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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아 Dec 30. 2021

유랑 이후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여럿이 부대끼며 사는 삶이 꽤 괜찮아진 것

재택 번역일을 하며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종종 본가에서 머물렀다. 스무살에 서울 살이를 시작한 이후로 본가에서 몇 주 이상 지내보는 건 처음이었다. 주말에 하룻밤 자고 가거나 방학 때 길면 1주일 남짓 머물다 가는게 전부였다. 이번엔 이상하게 본가에 한 번 오면 서울에 있는 원룸으로 돌아갈 날짜를 자꾸 미뤘다. 10년 동안 혼자 사는 삶이 충분히 괜찮다고 느꼈는데 아니었나보다. 호주에서 쉐어하우스 살이를 하며 함께 사는 즐거움을 맛봐서인지, 가족과 같이 사는 일상에서 전에 못 느낀 평온함을 느꼈다. 


엄마가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을 보거나, 아빠가 호두를 까는 모습을 보는게 좋았다. 늦은 저녁 시간에 아직 안 끝난 일을 마무리하는 원룸에선 늘 정적이 흐르곤 했는데 본가에선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밤 늦게 혼자사는 원룸에 들어와 불을 켜면 차가운 공기가 흘렀는데 본가 집은 언제 들어와도 따뜻했다. 아빠가 티비 보는 소리, 엄마가 이웃 아줌마와 통화하는 소리. 그런 작은 소리들이 방을 채웠다. 아침 저녁으로 밥 짓는 냄새가 풍겼고 엄마가 겨울을 맞아 고구마를 잔뜩 사오면서 달달한 고구마 익는 냄새가 났다.


호주에서 여러 사람들과 같은 집에 살면서도 느꼈던 건, 누군가와 함께 살면 집 안에서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는 것들이 다양하고 풍부해진다는 거다. 시각, 촉각, 청각, 후각에 여러가지 자극을 받게 된다. 실제로 이렇게 오감을 자극하는 환경이 우울증이나, 독거로 인한 고립감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원룸에 사는 많은 청년들이 저녁이나 주말에 해야할 일이 있을 때 방에서 나와 카페든 어디로든 가는 것 아닐까. 내 눈 앞에서 변하는 풍경과, 주변에서 들리는 말소리, 커피 냄새, 빵 냄새 같은 것들이 나의 감각을 자극해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뇌 활동이나 기억을 활발하게 만들어 카페에서 작업이 더 잘 되는지도 모른다.


여러 형태의 집을 이동하며 새롭게 중요성을 알게 된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스몰 토크의 힘'이다. 스몰 토크를 한국어로는 한담 또는 잡담이라고 하는데 '심심하거나 한가할 때 나누는 이야기'로 뜻풀이가 되어 있다. 한국에선 '수다를 떨다' 라고 하면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뜻일 수 있는데, 호주에서 외국인 친구들이 교류하는 모습을 보며 스몰 토크가 지닌 새로운 의미를 알게 됐다. 


나와 영국인 친구가 대화를 나누다가 호스텔 엘레베이터를 탔다. 안에는 다른 외국인 한 명이 있었다. 영국인 친구는 나에게 '잠깐'이라는 손짓을 하며 하던 말을 멈추더니 외국인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로비에 도착해 그 친구를 아냐고 물었더니 처음 본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저 사람을 신경 쓴다(care)는 것을 표현하는 의미로" 말을 건넸다고 했다. 호주에서 이런 광경은 쉽게 볼 수 있는데 마트에서도 계산대에 있는 직원과 손님이 서서 가벼운 잡담을 나눈다.

 

방을 혼자 쓰고 거실을 공유하는 형태에 사는 외국인 친구들의 쉐어하우스에 놀러갔을 때도 그들은 누군가 거실에 있으면 몇 분이라도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우리끼리 방에서 놀다가도 "거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러(socialize) 가자"며 잠시라도 시간을 함께 보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을 신경 쓴다는 의미로 몇 마디라도 나누거나, 안부를 주고 받는 행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꼭 영국이나 미국에서 온 친구들만 그랬던 건 아니다. 호스텔, 쉐어하우스에서 어울려 살다 보니 그래도 한 지붕 아래 사는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식을 공유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로 느껴졌다. 처음엔 질문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어색했고, 사생활을 침범하는 건지 걱정했다. 또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해 있다보니 집에서 애를 써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일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벼운 맘으로 조금씩 배워갔다. 처음엔 인사하기, 그 다음엔 안부 묻기부터 작게 시작했다. 하우스메이트가 최근에 하고 있는 일을 기억해 근황을 묻고, 하는 일이 잘 되길 바란다는 말을 인사로 건넸다.


곳곳에서 만들어내는 이런 '스몰 토크'가 주는 좋은 영향을 느꼈다. 말 몇 마디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생각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내 일상과 기분과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줬다. 영국인 친구 말대로 서로를 신경 쓴다는 느낌을 주고 받는게 힘이 됐다. 혼자 살 때 집에서 늘 무표정으로 있었다면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면 한 번이라도 더 웃게 되었다. 내 일상에 대해 받는 사소한 관심들이 지지나 격려로 이어지기도 했고, 나도 같이 사는 이들에게 작게 나마 힘을 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원룸 살이를 할 땐 알 수 없던 것들이었다.


다시 홀로 서울 살이를 하니 이런 자연스러운 침범과 작고 쓸모 없는 대화가 삶에 좀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족들과 본가에서 지내는 시간들이 전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비록 호주 유랑기는 코로나로 예정보다 일찍 끝났지만 유랑을 시작하던 때 목표했던 건 여전히 그대로다.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마음, 조금 다른 삶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


삶의 모양은 사는 곳, 장소, 만나는 사람들, 하는 일의 종류와 방식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화한다. 유랑 시기를 거치며 '변화'를 생각하던 때 이런 글을 봤다. 오마에 겐이치라는 일본의 경제학자가 한 말이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익숙한 서울의 환경을 떠나 여러 곳에서 살며 새로운 사람을 사귀고 시간을 다르게 보낸 경험이 내 안에 좋은 양분을 많이 주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간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풀어내 사람들과 좋은 것을 나누고 싶다.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을 사귀며 삶이 자연스럽게 침범당하면 좋겠다. 조금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유랑을 시도했거나 유랑하고 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혼자 또 같이 살아가는 주거 형태에서 살 수 있는 미래를 준비해야겠다.

 

언젠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사람에게 나의 유랑기가 닿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완벽한 집도, 완벽한 유랑도 없지만 모든 유목 생활은 추억을 남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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