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부진한 현실과 인내와 기다림의 시기
나쁜 일이라는 소용돌이가 휩쓸고 난 뒤
해결할 일들을 해결하고, 감정의 소용돌이 시기가 지나가고 어느덧 조금은 무더져 갈 무렵, 제 2의 시기가 시작된다. 울만큼 울고, 화낼 만큼 화내고, 이제는 조금 견딜만 해 진 것 같을 때, 이제는 조금 잊힐만 할 것 같을 때, 이젠 그 일이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을 때, 현재와 미래에 집중해 할 일들을 해 나가려고 마음을 다잡을 때, 아주 지독하고 기나긴 인내의 시기가 다가온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고, 설레지도 흥분되지도 않는다. 화가 날 땐 열정이라도 있었는데 (열정은 희망과 결단의 합이라고 한다) 지금은 부글거리는 열정 같은 건 없다. 그렇다고 완벽히 무력하지도 않다. 이런 시기를 다음과 같이 이름 붙일 수 있다.
노잼시기, 무감각의 시기.
무엇을 하든 크게 재밌지 않고 마음에 와닿지 않고, 엄청나게 내 마음을 뒤흔들 사건도 사람도 없다. 과거의 아픔들을 생각해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그래서 어떠한 감정도 내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다. 기분이 좋지 않고 행복하지 않고 하루하루가 흥미롭거나 재밌지 않다.
식은 커피 같은 시기
미지근한 물 같은 시기
시야가 보일 만큼의 터널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
아무 감흥이 없고 행복에 대한 기대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딱히 없다
나쁜 일이 우리에게 몰아칠 때 우리에겐 널뛰는 감정이 있고, 분노로 인한 에너지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면서 좋은 것을 기다리고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더 힘들어지는 시기는 나쁜 일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는데 아직도 계속 더 견뎌야 하는 시간들이다. 예를 들어 수능에서 원하는 대학에 떨어졌을 때 재수를 시작하고 난 후의 하루하루.
나쁜 일과 좋은 일들은 우리를 흥미로운 곳으로 데려간다. 흥미로운 감정과, 생각과, 행동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감정과 생각과 행동이 변화하고 이동하면서 역동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런 역동성이 사라지고 나면 견뎌야 할 일상만이 하루하루 펼쳐진다. 일상은 보통 지루하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감정이 무감각해진다. 감정의 동요가 없다.
나쁜 일은 슬픔, 분노와 같은 흥미로운 감정들을 불러온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 특히 분노는 어떤 면에서는 에너지를 준다. 해야 할 일과 과제를 준다. 그리고 그 과제를 해결해내는 데서 성취감도 준다. 그리고 나쁜 일에 처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다.
불꽃이 튀기는 긴박하고 힘든 시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무 일 없이 견뎌내는 시기, 혼자 견디는 시기다.
“우산을 쓸 수도 없는 흐린 날에는 어디로 걸어가야 할까”
이런 흐린 날이 인생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나쁜 일이 있어서 다행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쁜 일은 인생에 경종을 울리고, 해결할 과제를 주고,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나쁜일로부터 한 발 자국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한다. 삶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게 한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좋은 일을 정말 좋아할 수 있게 해준다. 좋은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다.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나쁜 일이 남기고 간 잔해를 치우는 일.
흐린 날은 그래도, 비가 그쳤다는 신호다.
이제 조금 괜찮아졌다는 거다.
맑은 날이 올 수도 있을 거라는 신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