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은을 만난 것은 친한 친구의 소개였다.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친구를 소개해주겠다며 친구가 데려온 것이 애은이었다. 회사생활에 대한 고민부터 한가롭게 즐기는 취미까지 정말 잘 맞다 싶었다. 애은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내 얘기를 들어줄 땐 따스하고 포근한 위로가 느껴졌다. 미소를 지을 땐 코를 찡긋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와 나는 수많은 주제를 넘나들며, 다시는 못 만날 연인처럼 대화를 나눴다. 경험해보지 못한 확장감과 짜릿함이 우릴 계속 빠져들게 했다. 술 먹고 떠들기만 해왔던 여느 친구들과는 나누지 못했던 감정이나 속내 같은 것들이 이때다 싶게 터져 나왔다. 우린 이 기분에 더 젖어들고 싶었다.
찢어낸 종이에 각자 3개의 단어를 적어 6개의 단어를 모았다. 그중 아무거나 2개씩을 뽑아, 종이에 적힌 단어들을 주제로 일주일 동안 글 한 편을 써오기로 했다. 내가 뽑은 단어는 '연인'과 '시계'였다.
얼른 일주일이 지나, 그녀의 글을 읽고 싶었다. 우리는 북촌마을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북촌을 마음껏 거닐고 싶어, 깊숙한 골목에 자리 잡은 카페를 골랐다. 도심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지만, 도심의 풍경이 사라져 왜인지 더욱 생경한 느낌을 주는 곳. 나는 그런 북촌을 좋아했다. 우린 그곳에서 서로의 글을 읽기로 했다.
그 날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온도가 북촌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느꼈던 기분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순식간에 열려버린 내 마음 사이로, 처음 느껴보는 설렘과 두근거림이 은하수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발 길을 재촉해 도착한 카페에 애은은 먼저 도착해 앉아있었다.
"나 얼른 네 글을 읽고 싶어. 참기가 힘들어서 일찍 도착해버렸어."
"나도! "
떨리는 마음으로 적어온 글을 그녀에게 전했고, 나도 그녀의 글을 읽었다. 그녀의 글은 남겨두지도, 기억이 나지도 않고, 지금은 나의 글만 남아있다.
내가 알기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치마가 전부 4벌, 그중에 1벌은 색이 빠진 듯 어설픈 핑크색에 레이스가 두어 겹 둘러 대어 진, 무릎보다 약간 높은 길이의 치마. 다행히, 내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의 눈치로 최근엔 그 치마는 본 적이 없고. 청바지는 2벌. ‘요새 이 브랜드는 너무 흔해졌다’며 극구 말리던 나를 되려 핀잔주며, 기어코는 그녀가 사고만 명품 청바지 한 벌. 그리고, 최근 들어 부쩍 나를 만날 때 자주 입고 오는 청바지 한 벌은 유니클로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들 중에서 두 어번인가 뒤적거리다 집어 입어 보고는, ‘싼 맛에 하나 사지 뭐?’ 라면서 샀던가. 회사 갈 때 돌려 입는 블라우스 대여섯 벌과 목이 늘어진 반팔 몇 개까지 포함해서 상의가 10벌 정도. 어제 그녀가 입고 왔던 티셔츠는 어찌나 꼴 보기가 싫던지. 살짝 늘어나 그 수명이 다해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던 연약한 재질감이 그렇게도 미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1년 전인가 프리미엄 아울렛에 함께 가서 색이 피부와 잘 어울린다며 내가 사준 옷이었건만. 이제 와서 내 취향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 연약한 재질감이 문제라니까…'
연애라는 것이 그렇다.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상대방의 일정한 표정, 대답 등의 행동 양식이 어렴풋이 짐작이 되고, 잃어가는 설렘을 적응과 편안함이라는 단어로 치환하며 나 자신을 설득해 나가는 자기 최면과도 같은 것. 누구를 만나도 그러한 감정의 패턴은 공부를 안 하면 시험을 못 보게 되는 것,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 나이를 먹으면 주름이 생기고 힘이 빠지게 되는 것들 만큼이나 명확한 불변의 진리.
지금이 오전 11시 40분쯤이니까, 정확히 1시간 20분 후쯤 만나기로 한 삼청동의 카페 ‘Watch’. 얼마나 자주 그곳을 갔었는지. 그곳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노라면 정확하게 1분 뒤쯤, 주인 누나가 어슬렁 주문을 받으러 온다. 우리에게 매주 자신의 넋두리를 하는 재미가 들린 게 아닌가 싶은 주인 누나의 지문 묻은 뿔테 안경을 생각하니 지금도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런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늦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씻고 부리나케 챙겨도 빠듯한 시간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천근만근인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을 심산이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그녀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자기야, 미안한데 나 감기에 걸린 건지 지금 미열이 조금 있네..
조금 더 쉬다가 늦은 저녁쯤에 보면 어떨까?
그는 그런 사람이다. 고개를 돌리면 1분에 두 세명쯤은 지나가는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긴 여자들의 진한 향수 냄새보다, 우리 집 이불 냄새를 좋아하는 남자. 새로운 맛집을 찾아다니며 가게마다 다른 손 맛에 억지로 입 맛을 맞춰내며 감탄사를 연발하기보단, 매일 먹던 그 흔한 엄마표 김치찌개가 제일 맛있다고 해맑게 웃어주는 남자.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한 번 해보라고 억지로 데려가 앉혀 놓은 미용실에 가서도 결국에는 ‘그냥 조금만 다듬어 달라’고 말하고 타협하지 않을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런 남자.
그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예민해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어떤 상황을 즐기는지. 그라는 사람을 알기 위해 내가 보낸 시간만도 어느새 1년 하고도 6개월. 그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서로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 이유 없이 짜증을 내다가도 미안하다는 진심 한 마디면 ‘그래, 네가 그렇지 뭐.’라고 눈을 흘기면서도 이내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가족 같은 것.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그저 그런 인생 보다, 가끔은 슬프고 화내더라도 내일을 기대하며 살 수 있는 거대한 이유 같은 것.
그는 나에게 그런 것,
그런 사람, 그런 존재, 그런 이유,
그런 모든 것.
조금 미리 나가서 삼청동에 있는 그와 나만의 아지트 ‘Watch’의 주인 언니한테 오늘은 특별히 더 맛있게 커피를 내려달라고 애교를 좀 부려놔야지. 토요일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부턴가 팬티를 입지 않고 외출하는 것만큼이나 기분이 찝찝하다던 그를 위해서. ‘후훗, 어쩜’ 여전히 귀여운 그의 미소를 생각하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만 혼잣말을 뱉고 만다. ‘이제 나가봐야지!’ 하는 순간 핸드폰에 그가 보낸 메시지가 하나 도착한다.
이제 출발하나?
서로의 글을 읽고 나서 주고받았던 눈빛이 기억난다. 샘솟는 애정을 애써 눌러 참아내는 표정을 한 채, 우리는 쓸데없이 가을바람을 추켜세우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좋다.
이런 바람을 느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녀는 결심한 듯 어떤 문장을 입에 머금고 뱉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말을 떼기 전 내가 먼저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수많은 생각이 찰나에 스쳐갔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 사실 할 말이 있는데..."
"잠깐만. 혹시 내가 먼저 말을 해도 될까?"
하지만 나는 결국 그 말을 하고 말았다.
"사실 나 오랫동안 만나온 사람이 있어. 먼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꺼내."
"아..."
"굳이 먼저 하지 않아도 되는 얘기였다면 미안. 네가 하려던 말은 뭐였어?"
".... 응, 별거 아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진 애은의 표정이 보였고, 애은은 난데없이 다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집에 돌아가는 길의 북촌은 괴상하리만치 완벽한 정취를 뽐냈다. 정적이 흐르는 길가에 주황빛 가로등이 은은히 퍼져나갔다. 고독한 정적 사이로 철 지난 매미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누기 싫은 작별을 하며 그녀를 보냈고, 나는 그 이후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북촌을 갈 때면 꿈속을 걷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북촌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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