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브랜드의 DNA를 배우자는 취지로 회사 임원들을 모시고
프랑스 파리 현지의 명품 브랜드 본사의 공방 투어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 루이뷔통 공방 가볼 수 있는 거야?!'
많은 임원들을 모시고 해외 출장에 나서는 일은 부담스러웠지만, 둘도 없는 배움의 기회가 될 것 같아 흥분됐었다. 해외 브랜드들의 본사를 컨택해 약 2박 3일간의 알찬 일정을 계획하였고, 약 스무 명의 임원들을 모시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학교 때 배낭여행으로 일주일간 파리에 머무른 이후, 약 10년 만에 두 번째로 파리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10년 전엔 아침마다 바게트 빵을 뜯어먹으면서도 '이게 다 유럽 감성'이라며 좋아했지만, 그곳을 다시 찾은 나는 소위 말하는 '대기업 사원'이 되어 있었다.
회사 돈으로 패키지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는거냐며
욕을 먹는 프로젝트였지만 배울 점은 많았다.
몇십 년간 기술을 닦아온 장인들이 실제 공방에서 한 땀 한 땀 제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품 기획, 상품 제작, 오프라인 매장 운영 등 전반의 과정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서로의 노하우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마케팅 헤드들과의 워크숍까지. 프리미엄 시장 진출을 위해 분투 중이던 각 파트의 임원들은 일정에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공방을 직접 방문했던 많은 브랜드 중 나의 마음을 제일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은 초고급 남성 가죽 브랜드였다.(지금은 한국 시장에도 진출해있더라.)
'달빛에 가죽을 말려 모든 가죽마다 각기 다른 고유의 색깔을 가지게 된다고요? 장인들이 직접 물광을 내 빛을 받을 때마다 묘하게 다른 색으로 보인다고요?'
이미 홀린 듯 제품을 바라보고 있던 나. 담당자에게 제대로 영업당한 것이 분명했다. 주변 임원들의 표정을 보니 홀린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나 저거 살래...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출국일에는 약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쏜살같이 전날 방문했던 가죽 브랜드의 매장으로 달려가 약 한 달치 월급에 버금가는 가격의 가방을 고민 없이 질렀다.
'나 이거 평생 쓸 거야.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감성과 디자인.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사이즈. 이건 정말 현명한 소비!'
라고 자기 합리화를 마치고, 방금 산 가방을 둘러 맨 채 샹젤리제 거리에서 좀 더 쇼핑을 즐겼다.
'지금 이 장면,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봤던 것 같아. 나 완전 쿨 해!'
통통거리는 발걸음을 한 채 거리를 누볐다. 기분이 꽤 좋았다. 어르신들을 만족시키고 성공적으로 마친 프로젝트. 처음으로 산 내 명품 가방. 그걸 결제할 수 있는 나의 통장 잔고.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신나게 그 가방을 메고 다녔다.
가방에게 눈길을 주는 시선을 종종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방에 어울리는 옷, 신발, 액세서리 등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백화점을 향했다. 평소에는 왠지 들어가기가 어렵던 백화점의 명품 브랜드관도 그 가방과 함께라면 마치 출입증이라도 얻어낸 듯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가방이 이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명품관의 어떤 매니저에게는
'꽤 눈썰미가 있구나?'
생각하며 기분 좋은 겸손을 떨었다. 바리바리 쇼핑백을 싸들고 나는 작은 원룸으로 들어왔다. 사 온 물건들을 이리저리 몸에 걸쳐보며 거울을 봤다. 명품 가방과 명품 옷, 명품 신발은 꽤 잘 어울렸다. 사회에 나가 돈을 벌면, 사고 싶은 것도 실컷 사고 즐기며 살아야지 다짐했었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희생도 하지 않고 내가 제일 좋은 것만 하면서 살 거야.'
마음먹으며 머릿속에 상상했던 그림과 분명 똑 닮은 내가 있었다. 문득, 내가 산 첫 번째 명품 가방이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굴 흉내 내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 뒤로도 종종 '명품'을 샀다.
잘 차려입은 근사한 느낌을 가지고 싶을 때 입을 블랙 슈트.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주말에 입을 넉넉하고 세련된 후드. 트렌디하고 재치 있는 카 오너 느낌을 내고 싶어 산 키홀더. 명품을 사지 않는 소박한 씀씀이의 우월함에 대해서 설파하고 다니는 대신, 나는 내가 진짜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그것을 충분히 즐겼다. 때때로 그것은 몇 백만 원을 웃도는 럭셔리 브랜드이기도, 2-3만 원의 아울렛 세일 상품이기도, 일본 중고샵의 1+1 제품이기도 했다.
10년 전 해외 출장길에서 호기롭게 샀던 첫 번째 명품 가방은 여전히 나의 최애템이다. 클래식한 감성,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 충동구매긴 했지만, 그때 생각했던 대로 현명했던 소비였다. 그때보다는 조금 더 커진 방의 옷장 어딘가에 특별하게 모셔져 있는 그 가방은 여전히 때때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는 했다.
정말 너 다운 걸 가졌냐고.
그게 진짜 가지고 싶은 것이 맞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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