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물킴 Feb 23. 2021

해외 출장을 가서 명품 가방을 샀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DNA를 배우자는 취지로 회사 임원들을 모시고

프랑스 파리 현지의 명품 브랜드 본사의 공방 투어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 루이뷔통 공방 가볼 수 있는 거야?!'


많은 임원들을 모시고 해외 출장에 나서는 일은 부담스러웠지만, 둘도 없는 배움의 기회가 될 것 같아 흥분됐었다. 해외 브랜드들의 본사를 컨택해 약 2박 3일간의 알찬 일정을 계획하였고, 약 스무 명의 임원들을 모시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학교 때 배낭여행으로 일주일간 파리에 머무른 이후, 약 10년 만에 두 번째로 파리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10년 전엔 아침마다 바게트 빵을 뜯어먹으면서도 '이게 다 유럽 감성'이라며 좋아했지만, 그곳을 다시 찾은 나는 소위 말하는 '대기업 사원'이 되어 있었다.



회사 돈으로 패키지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는거냐며

욕을 먹는 프로젝트였지만 배울 점은 많았다.

 

몇십 년간 기술을 닦아온 장인들이 실공방에서 한 땀 한 땀 제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품 기획, 상품 제작, 오프라인 매장 운영 등 전반의 과정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서로의 노하우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마케팅 헤드들과의 워크숍까지. 프리미엄 시장 진출을 위해 분투 중이던 각 파트의 임원들은 일정에 높은 만족도를 보였다.


공방을 직접 방문했던 많은 브랜드 중 나의 마음을 제일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은 초고급 남성 가죽 브랜드였다.(지금은 한국 시장에도 진출해있더라.)


'달빛에 가죽을 말려 모든 가죽마다 각기 다른 고유의 색깔을 가지게 된다고요? 장인들이 직접 물광을 내 빛을 받을 때마다 묘하게 다른 색으로 보인다고요?'


이미 홀린 듯 제품을 바라보고 있던 나. 담당자에게 제대로 영업당한 것이 분명했다. 주변 임원들의 표정을 보니 홀린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나 저거 살래...


무사히 일정을 마치고, 출국일에는 약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쏜살같이 전날 방문했던 가죽 브랜드의 매장으로 달려가 약 한 달치 월급에 버금가는 가격의 가방을 고민 없이 질렀다.


'나 이거 평생 쓸 거야.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감성과 디자인.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사이즈. 이건 정말 현명한 소비!'


라고 자기 합리화를 마치고, 방금 산 가방을 둘러 맨 채 샹젤리제 거리에서 좀 더 쇼핑을 즐겼다.


'지금 이 장면,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봤던 것 같아. 나 완전 쿨 해!'


통통거리는 발걸음을 한 채 거리를 누볐다. 기분이 꽤 좋았다. 어르신들을 만족시키고 성공적으로 마친 프로젝트. 처음으로 산 내 명품 가방. 그걸 결제할 수 있는 나의 통장 잔고.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신나게 그 가방을 메고 다녔다.


가방에게 눈길을 주는 시선을 종종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가방에 어울리는 옷, 신발, 액세서리 등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백화점을 향했다. 평소에는 왠지 들어가기가 어렵던 백화점의 명품 브랜드관도 그 가방과 함께라면 마치 출입증이라도 얻어낸 듯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가방이 이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명품관의 어떤 매니저에게는


'꽤 눈썰미가 있구나?'


생각하며 기분 좋은 겸손을 떨었다. 바리바리 쇼핑백을 싸들고 나는 작은 원룸으로 들어왔다. 사 온 물건들을 이리저리 몸에 걸쳐보며 거울을 봤다. 명품 가방과 명품 옷, 명품 신발은 꽤 잘 어울렸다. 사회에 나가 돈을 벌면, 사고 싶은 것도 실컷 사고 즐기며 살아야지 다짐했었다.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희생도 하지 않고 내가 제일 좋은 것만 하면서 살 거야.'


마음먹으며 머릿속에 상상했던 그림과 분명 똑 닮은 내가 있었다. 문득, 내가 산 첫 번째 명품 가방이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대체 누굴 흉내 내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 뒤로도 종종 '명품'을 샀다.


잘 차려입은 근사한 느낌을 가지고 싶을 때 입을 블랙 슈트.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은 주말에 입을 넉넉하고 세련된 후드. 트렌디하고 재치 있는 카 오너 느낌을 내고 싶어 산 키홀더. 명품을 사지 않는 소박한 씀씀이의 우월함에 대해서 설파하고 다니는 대신, 나는 내가 진짜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그것을 충분히 즐겼다. 때때로 그것은 몇 백만 원을 웃도는 럭셔리 브랜드이기도, 2-3만 원의 아울렛 세일 상품이기도, 일본 중고샵의 1+1 제품이기도 했다.


10년 전 해외 출장길에서 호기롭게 샀던 첫 번째 명품 가방은 여전히 나의 최애템이다. 클래식한 감성,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 충동구매긴 했지만, 그때 생각했던 대로 현명했던 소비였다. 그때보다는 조금 더 커진 방의 옷장 어딘가에 특별하게 모셔져 있는 그 가방은 여전히 때때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는 했다.



정말 너 다운 걸 가졌냐고.
그게 진짜 가지고 싶은 것이 맞냐고.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연봉 1800만 원을 제안받았다. (brunch.co.kr)

상사가 던진 소주잔에 맞아본 적 있나요? (brunch.co.kr)

10년간 직장생활을 했더니 알게된 것들 (brunch.co.kr)

회사에서 만난 어른다운 '어른' (brunch.co.kr)

01화 망조가 든 회사의 징후들 (brunch.co.k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