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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물킴 Jan 07. 2021

상사가 던진 소주잔에 맞아본 적 있나요?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해외 본부로 배치된 신입사원들은 회사 발전의 밑바탕이 되어준 국내 조직과 내수 시장에 대한 이해를 위해 약 3달간 지역본부에 배치되어 근무를 했다. 높은 전투력이 필요한 영업조직이다 보니 거친 야생미를 가진 선배들부터, 몇십 년의 근속을 자랑하는 선배들까지 그 구성이 다채로웠다.


해외 본부로 배치된 신입사원이라는 이유로 왠지 엄청난 엘리트 대접을 받았지만, 그걸 아니꼽게 보는 상사들도 물론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신입사원을 멸시하며 본인들의 자존감 충천을 하곤 했다. 그땐 나 역시 그런 레벨 1 수준의 공격에도 휘청휘청했다. 첫 정규직 회사생활이었으니까.



그 지역본부의 헤드는 배구선수 출신의 영업맨이었다.

예전에는 운동선수 출신을 특별 채용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고. 영업력에서는 성과를 인정받았지만, 평소 거친 언행이 단점으로 지적되는 리더였다. 잠시 거쳐가는 신입사원을 3개월 동안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 못마땅해했던 그는 그 불만을 나에게 종종 눈에 띄게 표출하곤 했다. 물론 그 인사제도를 내가 짠 것은 아님에도 말이다.


입사하고 첫 회식은 앞으로 몸 담을 조직이 아니라, 3개월간 머물러야 했던 그 팀과 하게 되었다. 허름하지만 맛을 자랑하는 동네 노포 삼겹살집이었다. 제조업인 데다, 영업조직의 회식이었으니 강도 높은 술 강요 문화가 있었다. 술을 좋아하기도 했고, 곧잘 마시는 나에겐 다행히 그리 난이도 높은 과제는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은 경리 직무 선배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중, 난데없이 나에게 소주잔이 날아왔다.



'이런 XX, 너 내 말 안 들려?'


헤드가 나를 쳐다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일단 황당했지만 주변 상황을 빠르게 캐치해보니, 내가 옆자리의 선배와 얘기를 하느라 헤드의 말을 놓친 모양새였다. 그렇다한들 이 상황이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았, 떤 코멘트로 응수할지 고민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좋게 웃으며 넘어갈지, 일을 크게 만들지 생각 중이던 찰나 옆자리 선배가 적막을 깼다.


'아이 참~우리 팀장님은 참 터프하셔~하하하하~'


선배는 노련하게 내 옷에 묻은 소주를 닦아주며 웃었다. 주변 팀원들도 그 공허한 추임새에 발맞춰 웃음을 쌓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켰다. 마치 이런 일이 그리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이런 게 바로 사회인들의 '노련미'인가?

아님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적응을 선택한 을의 생존 방식인가 헷갈렸다. 어떤 열등감이 한데 뭉쳐 저런 괴물을 만들었고, 그 괴물과 자연스럽게 공생하기까지 이들에겐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정말 궁금했다. 침묵을 깬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 이어져야 하는 것은 나의 피드백이었다. 선택해야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지. 나는 선배들의 '노련미'를 흉내 내 보는 것을 택했다.


'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말씀을 놓쳤나 봐요.
한잔 따라 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넙죽 술잔을 내밀었다. 변죽 좋은 신입사원 인척 가득 담긴 소주를 패기 좋게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약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기억만큼은 어쩐지 생생하다. 소주잔을 얻어맞아서 기분이 나쁘다는 기억보다는, 불합리한 상황을 다 함께 목격했지만 서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암묵적인 합의를 반복하는 세계를 처음으로 체험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그 이후에도 수도 없이 그 회사의 불합리를 경험했고, 그때마다 처음 목격했던 그 '노련함'을 떠올리고 흉내냈다. 나는 사회생활을 곧 잘하는 사원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감히 그 방식으로 건설된 세상을 내가 흔들거나,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면서도 좀 더 나아지는 세상을 만드는데 주저했음에 뭔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 뒤로 10년의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경험했던 불합리와 불평등은 비단 그 회사에서만 느낀 것이 아니었기에, 이 글을 특정 회사나 조직을 비난하기 위함은 아니다. 세상은 예전에도, 지금도 수많은 불평등과 강약의 적절한 공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악의 연대기를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 세대는 후배들에게 어떤 선배로, 어떤 시대로 기억될 것인가.

선배의 '노련함'을 흉내 내던 신입사원에서, 이제 그 정도의 책임감은 마땅히 짊어지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흔 살 가까이의 사회인이 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 '소주잔'을 던진 일이 과연 없었을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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