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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실 Sep 13. 2023

실패의 맛은 짜릿하다

삶은 날로 먹는 게 아니다


며칠 전에 시험이라는 걸 봤다. 나는 꽤 고집쟁이에 귀찮은 것을 무척 싫어하는 학생이어서 3년 내내, 그러니까 어떻게 하던 삶을 잘 살아 보려고 자격증 따기에 급급하던 학급 구성원들의 방향성은 개나 줘버리라고 했다. 그런 교복 시절 이외에 시험을 본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 시절 상업 고등학교라는 것이 일단 취업이든 진학이든 자격증 개수는 꽤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때라 적어도 5개는 따고 나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뭐라는 거야 하고 귀를 후비적대며 어떻게 하면 이 삶을 끝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지배적인 우울증 키드였던 나는 이렇게 가다간 자신이 근무하는 기간에 치명적인 오점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미래를 본 (그럴 만도 한 게 나는 학교에서 자해를 해서 119를 불렀던 요주 인물이었다) 학생주임 선생님의 면담 아래 딱 기본적인 다섯 개의 자격증만 따면 수업 시간에 네가 뭘 하던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겠다는 계약 아닌 계약 아래 1년 만에 그 5개의 자격증을 전부 취득하고 2년 내내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보면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거 같다. 한 번도 안 떨어지고 전부 취득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으니까. 필요에 의해서 하는 공부는 제법 성실하고 착실하게 해 내어 결과를 맛보았다. 억지로 봤던 수능 모의고사도 350점 이상 나왔던 결과가 그 이야기를 뒷받침 해준다. 그런데 이게 자랑이라고 할 게 없는 게 나는 수능이 귀찮다는 이유로 원서 접수조차 안 하고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홍보차 온 이름 모를 교수의 이야기에 큰 생각 없이 집 근처 이름 없는 대학에 입학금과 1학기 장학금을 받고 갔었다. 그리고 정말 거침없이 술과 진통제에 빠져 2년을 보내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성적으로 보잘것없이 졸업을 했다.




아마 내 인생의 커리어는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왜 그런 말 하지 않는가,
과거로 돌아가면 공부를 죽어라 할 거 같다고.
아마 그때 내 머릿속에 진학이라는 목표가 뚜렷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 시절 이후로 오랜만에 시험이라는 걸 봤다. 대충 유튜브 영상들을 보니 한 달 정도면 필기 정도는 너끈히 딴다고 되어 있었다. 근데 웬걸, 나는 그런 착실한 성격이 못 된다. 발등에 불이 붙어서 지글지글 미디엄 레어로 잘 익고 있어도 그 위에 마시멜로를 굽고 있을 사람이다. 한 달 동안이나 공부를 할 리가 없지. (근데 이제 해야 할 듯) 내 시험공부는 시험 전날 밤 9시부터 시작을 했다. 뭉그적거리면서 영상도 보고 책도 좀 펴보고 하긴 했다. 그래도 뭐 전날부터 한 공부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나는 떨어졌고 몇 개만 더 맞췄으면 붙었을 텐데 아쉽다는 후회조차 안 생기는 어이없는 점수로 불합격을 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느낌은 익숙하지 않다. 왜냐? 신기하게도 이 시험의 직전 시험들은 단 한 번의 불합격 없이 전부 합격이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좀 재수가 없긴 하다.




(내 경험상)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의 특징 중 하나가 굉장히 사소한 일에 감정이 용인의 꿈과 희망의 나라에 있는 제일 인기가 좋은 놀이기구 마냥 들락날락한다. 멘탈이 건강한 사람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도 세상이 끝날 것 처럼 나 같은 쓰레기가 무슨 합격이냐 부터 시작해서 온갖 자기 비하를 하면서 땅을 파고 또 판다. 다시 도전하고 시도할 힘을 거기에 다 써버리는 것이 문제다. 운이 좋게도 주변의 격려와 미디어의 힘으로 다시 시험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도 이미 땅 파는데 힘을 다 써 버려서 도무지 책을 펴고 영상을 틀 생각을 못 한다.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세월아 네월아 가다가 더욱더 운이 좋아서 나이가 몇 살 더 먹고 나서 취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그나마 치료라는 적당한 조치가 들어갔을 때 이야기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거기서 The End 다.



그래도 나는 2n 년째 조울증 치료 중이고 (최근엔 조증삽화가 거의 오지 않아 병원에서도 만성 우울증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데 결론이 안 났다) 적절한 노하우가 쌓여 있는 상태라 전자 쪽에 가깝다. 멘탈을 다 잡고 다시 도전을 할 정도의 여유는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또 걸리는 게 그놈의 징크스다. 내 징크스 아닌 징크스(라고 하지만 꽤 오래된)는 정말 그 결과에 걸맞은 노력을 해야 그 결과가 손에 들어온다. 이건 당연한 거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동의한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예를 들어, 시험 같은 경우는 꾸준히 공부를 하면 절대 붙은 적이 없고 한 일주일 전부터 매일매일 잠을 줄여서 몸이 강도가 약한 이상이 올 정도로 나를 혹사해야 그 자격증을 딸 수 있다. 회사 업무 같은 경우는 야근을 몇 날 며칠을 하고 졸음 때문에 어지러워서 회사에서 쓰러질 뻔한 적이 있어야 그나마 성과를 돌려받을 수 있다. 마치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을 향한 고행 같고 득도를 향한 부처님의 단식 같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까지 해야 결과가 손에 들어온다. 이것은 참 억울한 점이 아닐 수가 없다. 물론 그 정도는 해야지 보상을 받지 라고 하는 분들의 의견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이 다 맞다. 그냥 나는 그렇다는 거다.




나도 좀 쉽게 살고 싶었다. 그러고 싶다. 제발.




나이 탓을 하고 싶지 않은데 (이런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정말 철이 없다. 진짜.) 35살이 넘어가는 그 순간이 있었다. 실패의 맛을 쓰지도 달지도 않고 짜릿하다는 거. 그게 좋은 의미가 아니라 느슨해진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해 줄 만큼 짜릿하게 쓰리다. 맛으로 따지자면 요오드 액을 혀끝에 넣어드리는 거랑 비슷하려나. 졸린 상태에서 그 맛을 본 적이 있는데 세상에 이런 맛이 있구나 하는 좌뇌의 느낌과 내가 자주 사용하는 욕설이 엔딩크레딧처럼 지나가는데 그 속도가 열 배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우뇌의 느낌을 기억한다. 몸은 그 기억의 삽입에 온 신경이 다 솟아올랐다. 아 지금 생각해 봐도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실패도 똑같은 것 아닐까.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잊히지 않아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낮잠이 너무 좋아서 신생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자기를 원하는 것 처럼 두 번 다시 그러지 말자 라는. 그렇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종종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결과를 맞이한 것이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것이겠지. 정신이 번쩍 들고 나면 보통 자신의 현재 위치를 되새김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이 든다면 반쯤 성공이다. 서두르지 마라. 요오드 같은 위력으로 반쯤 성공했으니까 반을 하는 방식은 나답게 하면 되더라.




누군가 숲을 보라고 하는데 우리는 지금 나무 보는 것도 버겁다.
안타깝게도 보통 매 순간 그렇다.
그래서 나는 미래 따위는 생각을 잘 안 한다.
이것은 좀 무모한 방법일 수도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건 좀 개소리 같다. 솔직히 두려워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참고 그냥 keep Going 하라는 게 맞지 않을까.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본능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마약 같은 존재 정도 하지 않고서야 늘 머릿속 한구석에 앉아있다. 그렇게 느긋하게 잠을 자고 있다가 뭔가 변화를 꾀하는 본체의 행위가 있으면 수능 시험 날 지각이 아슬아슬한 학생 마냥 튕겨 올라와선 자리를 잡고 앉는 것 같다. 불안이 심한 나 같은 사람들은 그냥 매표소 직원 마냥 계속 그 자리에서 손 흔들고 있는 거고. 나는 그걸 참는 게 안돼서 보통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 버리는 노력을 한다. 놀이공원의 입구에 있는 예쁜 알바생의 눈도 안 마주치고 지나가는 그런 것처럼. 그리고 나중에 후회도 많이 하지만 이게 나쁜 방법은 아닌 거 같다. 좋은 결과도 꽤 많았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지르는 사람들이 일명 "피"도 많이 보지만 좋은 결과를 많이 가져가는 지도 모른다. 방법을 못 찾겠으면 이것도 꽤 괜찮으니까 한번 해 보길 바란다.



물론 결과는 실행한 자가 책임지는 거다.

keep Going 하다가 치고 들어오는 두려움은 크락션 같은 인내로 이겨내길 바라면서.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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