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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Jun 14. 2018

사랑의 열매

영화 <봄날은 간다>, 열매가 열리기엔 여름이 좋다.


 친구와 유채꽃밭을 거닐었다. 노란 꽃이 가득한 5월 중순의 봄, 괜히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친구에게 물었다. "너는 결혼할 거니?" 친구는 몇 발자국 걸을 동안 대답이 없더니 건조하게 툭 대답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해야겠지" 나는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가 질문을 다시 건네주듯이 물었다.

 "너는?"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으면 결혼하지 않는 게 맞지 않나?" 친구는 모두가 하는 걱정에 대응하여, 모두가 정답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말해주었다. "정으로 사는 거지"

 나는 반박하듯 말했다. "여자와 남자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결혼했는데, 2-3년밖에 사랑하지 않고, 나머지 몇십 년을 정에 기대어 산다는 게 참 이상하지 않니?" 친구는 또 몇 발자국 걸을 동안 대답이 없더니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렇네"


 


<봄날은 간다>




사랑의 찌질함

 소제목을 [사랑의 찌질함]으로 정하고, '찌질함'의 정의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봤더니 연관 검색어로 '이별 후 카톡', '헤어지고 카톡'이 떴다. 우리나라의 찌질함은 아무래도 이별과 많은 연관이 있는 모양이다. 사랑할 때의 '호구력'과 연애의 진정성은 정비례한다. 이별 후의 '찌질함'은 이별의 진정성과 정비례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연애와 이별에 최선을 다한 남자다. 누구보다 호구였고, 누구보다 찌질했기에.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와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


  상우와 은수는 서로에게 빠르게 빠져들었고, 여느 연애처럼 달달한 시기를 지나게 된다. 남자는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서울에서 강릉까지 단숨에 달려간다.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여자를 꼭 안아주고, 누구랑 이렇게까지 마셨는지 정도는 묻지 않고 넘어간다. 다음 날 여자를 위해 북엇국을 끓이지만, 여자는 끝내 북엇국보다 잠을 택하고, 남자는 홀로 북엇국을 먹는다. 술에 취한 건 여자인데, 웬일인지 남자의 속이 쓰리다. 남자의 사랑은 북엇국인데, 아무래도 여자는 아닌가 보다.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남자가 묻는다. 너 나 사랑하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제 이별의 진정성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술 먹고 여자의 집 앞에 찾아간다. 집에 쳐들어가서 엉엉 울기도 한다. 전화를 해보기도 하고, 기다려보기도 한다. 여자가 별안간 찾아와서 포옹할 때, 또 뭐가 좋다고 같이 안는다. "한 달 동안 시간을 갖자"라는 말에 또 바보같이 기다린다. 이별 때문에 힘들어서 직장도 그만뒀다. 여자가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는 걸 보고 여자의 차를 열쇠로 긁어버린다. 남자는 견딜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 너무 거짓말 같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친구가 위로한다.


"그 여자가 할머니 됐다고 생각해봐. 그렇게 생각하면 더 편하지 않니?"

"그러네. 그러니깐 불쌍해진다. 보고 싶다."


상우에게 이별을 고하는 은수


 옆에 있어도 불안하고, 안고 있어도 사라질 것 같은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들. <500일의 썸머>의 톰이 그랬고,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의 한성이 그랬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덕훈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두 집 살림을 차려도 아내를 놓지 못했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매력적인 여자에 대한 집착이었는지는 이별 후에 결정된다. 상우는 진짜 사랑을 한 것일까? 그렇다면, 사랑이 어떻게 변하게 된 걸까.


 




사랑의 일회성

 은수는 결혼한 적이 있다. 그녀도 한 때, 한 남자와 영원을 약속했고 사랑의 영원함을 믿었었다. 그러나 이혼했다.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별의 아픔도 무뎌질뿐더러, 새로운 사랑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랑이 있는 건 알지만,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걸 깨달은 여자. 그래서 은수는 사랑에 겁을 먹지 않게 됐다.

 

대나무숲의 소리를 녹음하는 중, 은수


 

 상우는 분명 좋은 남자다. 이 남자를 놓치면 후회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아픔도 지나갈 것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이렇게 착한 남자라면, 자기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다 받아줄 것도 안다. "빨리 와서 라면이나 끓여"라고 타박 줬더니, 남자가 약간은 화난 듯 말한다. "은수 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조심해." 은수는 그 날, 상우의 짐을 다 내놓는다. 상우에게 사과하고, 대화로 상황을 풀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은수는 그럴 필요성을 못 느낀다. 누구와 맞춰가는 연애를 할 열정이 없다. 아니면 헤어지고, 좋으면 같이 있으면 된다. 은수도 상우처럼 있는 힘껏 사랑을 믿다가 배신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상처받기 전에 먼저 사랑을 배신한다. 그리고 보란 듯이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난다. 라면 같은 사랑. 사랑에게 배신당한 여자가, 어쩌면 사랑에게 복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사랑은 변하지 않아.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변할 뿐이지.



 이별 후에 은수는 다시 상우를 찾아간다. 상우에게 작은 화분을 건넨다. 햇볕에 놓아두고, 제 때 물을 주고, 가끔 들여다봐야 하는 작은 화분. 그러나 상우는 화분을 받지 않는다. 여자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간다. 이렇게 상우의 사랑이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나면 아픔도 무뎌지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의 상우는 평일에 강릉으로 무작정 뛰어가기보다, 주말이 오기를 기다리는 남자가 되어있을 수도 있겠다. 여자 친구가 술을 먹었으면, 북엇국보다는 간편한 라면을 끓이는 남자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 사랑은 이렇게 변하는 것이다. 


헤어지는 상우와 은수





다시, 유채꽃밭의 대화

 나는 영화나 드라마가 우리의 사랑에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애와 사랑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로 인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영원하고도 진정한 사랑을 전 국민에게 주입식으로 교육시키니, 나는 미디어에 나오는 사랑으로 내 현실의 연애를 망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래서 <봄날은 간다>가 좋은 영화다. 이별을 낭만적으로 그리지 않으며, 이별 후에 두 사람이 성숙해졌음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열매에게는 여름이 좋다. 열매가 열리려면 어차피 봄은 지나가야 한다. 사랑의 봄날은 가지만, 인생에서 무언가를 얻기엔 이별만큼 좋은 열매가 없다. <라라랜드>의 두 남녀는 꿈을 이뤘고, <그녀>의 테오도르는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별 후에 우리는 무언가를 반드시 얻는다.


 친구와 유채꽃밭을 거닐다가, 거처를 어디로 옮겨야 하나 고민 중이라 했다. 다시 본가에 들어갈지, 아니면 직장 근처에 다른 집을 구할지 선택이 어렵다고. 친구는 눈을 반짝이며 "너 만약에 직장 근처로 집 구하면, 지금 남자 친구랑 결혼할 것 같아. 느낌이 왔어!" 나는 몇 발자국 걸을 동안 별 대답을 안 하다가 가볍게 말했다.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


 그래도 나는 영원한 사랑을 믿는 상우를 응원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 날의 유채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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