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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Jul 03. 2018

1층에 사는 그 애

나의 짝사랑기

 내 첫사랑의 시작은 8살이었다. 아니, 아마도 7살의 끝자락이었을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에서 그 아이를 봤을 때, 나는 이미 그 친구를 좋아하는 중이었다. 어느 포인트에서 반했는지 지금 보면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 친구에게 푹 빠져있었다. 그 친구는 항상 배꼽을 만졌으니, 이름을 배꼽이라 하겠다.


 배꼽이는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그 친구는 1층 맨 끝집에 살았는데, 나는 그 사실을 행운이라고 여겼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가 복도에 버려놓은 벽돌을 딛고 올라가 아파트 밖을 내다보는 일이었다. 누가 들어오나 보고 있자면, 배꼽이도 어김없이 좁은 길을 걸어오곤 했다. 아마도 친구들이랑 놀고 오는 길이거나, 학원에 다녀오는 것일 테다. 그러면 나는 단숨에 1층까지 뛰어내려 가, 괜히 슈퍼 가는 척을 하며 배꼽이와 마주쳤다. "안녕"이라고 인사하면 배꼽이는 환하게 웃으며 "어디가?"라고 물어봐줬다. 나는 슈퍼 가는 '척'을 하는 것이지 정말로 슈퍼를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답을 못했다.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는데, 배꼽이는 날 따라오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아파트로 들어갔던 것 같다. 이렇게 인위적인 마주침이 몇 번 더 있었는데, 배꼽이는 그것이 내 노력의 결실이었다는 걸 영원히 모르겠지.


 배꼽이와 나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짝꿍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짝꿍이 한 번도 안 될 동안 배꼽이를 계속 좋아했다. 4년 동안 한 남자를 짝사랑하다니... 지금은 줘도 못 가질 인내와 끈기 었다. 고백을 하지는 못했지만, 고백 비슷한 건 했었다. 4학년 체육시간, 스포츠댄스를 배우는 날이었다. 선생님이 원하는 파트너와 한 곡 추게 해주는 자유시간을 줬다. 나는 굉장히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배꼽이에게 춤 신청을 했고, 배꼽이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정말 4년 동안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몰랐나? 하긴. 배꼽이와 나는 꽤나 친한 친구였고, 나는 배꼽이의 연애상담을 도맡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영원과도 같았던 3분의 춤이 끝나고, 배꼽이는 머쓱해하며 남자애들 틈 사이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배꼽이를 향한 짝사랑을 접기로 했다.


영화 <우리들>


 어린 나이였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이 남자애가 나와 손을 잡고 춤추는 시간을 굉장히 불편해하며, 춤이 끝나면 친구들에게 놀림받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구나. 나중에 알았지만, 좋아하는 같은 반 여자애가 보고 있어서 더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내가 알기론 배꼽이는 지금도 1층에 산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중, 여중으로 갈라진 후에는 마주친 적이 없다. 가끔 건너 건너 사진으로 근황을 보곤 했는데, 사진을 볼 때마다 '도대체 내가 왜...?'라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그 시절의 배꼽이는 참 귀엽고 씩씩했다.

 

 싱겁지만 배꼽이와 나의 이렇다 할 에피소드는 저 '춤'이 끝이다.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좋아한다. 내 감정이 묵직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왜 냅다 달렸는지 모를 나의 상황 대처 능력, 11살이 낼 수 있는 평생의 용기를 다 끌어모은 춤 신청, 그리고 약간은 씁쓸하게 끝나버린 짝사랑의 마무리까지도 참 좋다.


   이 글의 진정성이 떨어질까 봐 불안하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배꼽이를 접고, 조한선을 닮은 동갑내기 남자애를 좋아했다. 그 친구한테는 뜨겁게 고백하고 시원하게 차였다. 나는 두 번의 실패를 겪은 후, 학창 시절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아무것도'란 좋아하기, 관심 갖기, 고백하기, 차이기 등등을 말한다.


 저 애들을 생각하면 어떠한 종류의 분노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일까? 성인이 되어 만나고 헤어졌던 남자애들을 생각하면 왜 이렇게 분기탱천하게 되는 거지? 사랑의 신비란 이렇게 오묘하구나.


 배꼽이와 조한선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는 너네를 주제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아무튼 삶의 신비란 이렇게 오묘하다.



이 글을 쓰게 해 준, 영화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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