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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Oct 25. 2018

폴란드로 간 아이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이야기


 어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용기 내어 발언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얘기를 꺼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책임감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우리는 이런 무언의 약속들을 하면서 살아가므로, 귀찮을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때때로 모른 척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외면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대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다수를 불편하게 만들 힘도 못 가진 체, 무관심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것들이 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배우 추상미가 감독으로서 선보이는 첫 번째 장편 영화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야말로 우리가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것들'이다.




1951년, 한국전쟁 고아 1,500명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었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마마’, ‘파파’라 부르며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8년 후,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송환 명령을 받게 되는데…

2018년, 아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지금까지도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역사 속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가슴에 남아있는 위대한 사랑의 발자취를 따라 추상미 감독과 탈북소녀 이송, 남과 북 두 여자가 함께 떠나는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출처:다음 영화)


 나는 이 영화를 브런치 무비패스로 봤다. 흥미가 있어서 시사회를 신청한 것이 아니다. 열심히 리뷰를 써서 다음 무비패스에서도 활동하고 싶어서, 시사회 초대가 오는 족족 신청을 눌렀다. 그리고 평일 저녁, 무거운 몸을 이끌고 코엑스로 향했다.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나 시사회 왔다!"

"오! 무슨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이거야!"

"...잘 보고 와"

 난 쿡쿡 대며 버거킹에서 치킨 너겟을 집어 먹었다. TV로도 안 보는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보다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피곤하여 잠이나 안 들면 다행이겠다-라는 생각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보편적인 힘

 한국전쟁 당시 1,500여 명의 한국 아이들이 폴란드로 보내진다. 국경과 인종을 넘은 사랑은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하나로 만들어준다. 8년 후, 아이들은 북한의 어떠한 사회적 운동으로 인해 다시 귀국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폴란드를 떠난 후 아이들은 2년 가까이 선생님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지금은 그 생사를 알 수 없다.

 지천에 깔린 게 사랑이다. 노래도, 영화도, 티비도 사랑을 싣고 달린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은 너무나 보편적이지만, 이 영화의 사랑은 내가 아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존재하지만, 존재한다는 걸 애써 부정해 온 무서운 것을 만난 기분이었다. 사랑이 두려운 영화였다. 왜 나는 두려움을 느꼈는가. 나는 남자친구와 부모 그리고 길거리에 다니는 고양이를 사랑할 수 있지만, 국경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고, 결정적으로 가까운 북한 사람들을 사랑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

 영화관 안에 훌쩍이는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기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니 마음이 먹먹하다. 아이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폴란드의 신사가 안쓰럽다. 영화 자체는 덜 정돈된 느낌에, 다큐멘터리 치고는 작위적인 연출들이 있지만, 폴란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만큼은 진정한 다큐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그 폴란드인의 눈물을 실제로 보지도, 만지지도 못했지만 정말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찌하여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아끼며 사랑할 수 있을까. 영화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국가적, 세계적 아픔을 담고 있다.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그리고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우리나라 아이들을 돌봐줬던 파란 눈의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피곤해서 잠이나 안 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너무 편하게 살았지. 언제나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편하게 살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영화를 열심히 보고, 관심을 갖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나는 잠시만 슬퍼하고, 금방 <스타이즈본>을 보면서 이 영화를 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끄럽다. 잊지 말자는 다짐이 바닷가에 세워진 모래성 같다.





그래도, 사랑

 서론에 썼던 글을 다시 한번 쓰고 싶다.


 어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용기 내어 발언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얘기를 꺼냈다는 이유만으로도 책임감을 갖게 될 때가 있다. 우리는 이런 무언의 약속들을 하면서 살아가므로, 귀찮을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때때로 모른 척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외면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밌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대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대다수를 불편하게 만들 힘도 못 가진 체, 무관심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랑이다. 무너진 모래성을 계속 계속 쌓자. 기억하고 마음 아파하자. 사랑이 또 다른 우리를 키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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