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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y 03. 2022

시간의 얼굴

봄이 구술하는 기승전결의 마지막 단락 ‘결’에 이르렀다. 

봄의 서막을 알리는 2월은, 동장군의 결기가 한 겹 스르르 풀리면서 왠지 모르게 목덜미에 와닿는 바람결이 푸근하게 느껴진다. 머플러와 스카프를 오가며 봄이 오려나 먼발치를 자꾸만 기웃거리며 내다보게 된다. 마음속에 자그만 구름 풍선을 띄운다.


3월은 봄이 전개되는 대변환의 시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폭죽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소리 없는 작은 불꽃들이 흙더미를 비집고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찬란한 빛깔을 머금는다. 고개 숙여 보아야 파란 불꽃이 선명한 봄까치꽃, 노란 섬광 민들레, 제비꽃 보라색 열기 땅 위에서 활활 타오르고 나무들은 하양 연분홍 성냥불을 그어댄다. 처음에는 반짝반짝 한두 송이 피어나더니 어느새 가지마다 불이 옮겨붙는다. 


한번 붙은 꽃불은 열흘 밤낮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4월은 그들의 화염에 가려져 눈앞에 걸어오는 사람 얼굴이 분별이 안 될 정도이다. 싱그러운 이팔청춘이 아니고선 꽃나무 아래에서는 걸음을 멈추지 말고 그대로 걸어갈 것을 권유한다. 누가 누가 곱나? 내기라도 하다간 화사한 꽃빛에 밀리기 일쑤다. 


봄이 절정에 이른 삼사월 멀리 떠난 적 없이 집 주변을 서성이며 꽃구경을 한다고 했는데 왜 이리 아쉬운지… 벚꽃이 만발한 봄밤 동산에 올라 꽃가지 사이로 동아줄을 타고 내려온 초사흘 달을 보았다. 지상의 소동이 얼마나 매혹적이면 시속 100km 자동차로 5개월이 더 걸리는 38만 km를 단숨에 내려와서 벚꽃 속에 파묻힌 이 무렵 초승달도 샐쭉한 꽃으로 피어나더라! 



살포시 차오른 달은 꽃가지 사이로 담기지 못해 벗어나고 만다. 서로 예쁘게 보이는 거리와 때가 있는가 보다. 완벽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사랑스러운 거리가 필요할 뿐이다. 벚꽃을 사랑한 달은 충분히 빛나지 않는 작고 모나고 볼품없는 조각달이었다. 모자라기 때문에 벚꽃과 어우러져 빛나 보였다. 부족한 부분 서로 채워가며 하나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완성될 수 있었다.



봄이 다가온 삼월에는 코로나에 걸려서 봄이 무르익은 사월에는 후유증에 시달리느라 주로 갇혀 지냈다. 그러는 사이 버스 타고 지나가듯 유리창 너머로 봄은 굿바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떠나는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은데 배추 이파리만 한 나뭇잎들이 펄럭이며 오월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빗물 고인 웅덩이에 송홧가루 노랗게 아이라인을 긋는 오월의 첫날 모란이 한창이다. 

두 눈에 익숙한 자줏빛 모란은 안 보이고 분홍색 붉은색 흰색 모란이 바리데기가 저승길에서 구해온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처럼 강렬한 생명력으로 너울거린다. 저 커다랗게 너풀거리는 꽃들을 한 송이씩 따다가 얼굴에 가슴에 문지르면 업보가 소멸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만 같다. 모란이 뚝뚝 지고 말면 아리따운 작약이 남아있다. 모란은 작약을 피우기 위해 사뿐히 즈려 밟고 지나가는 절차라고 하면 실례일까.


5월의 신부 손에 수줍게 들린 흰 작약 부케 꽃말은 ‘행복한 결혼’. 내게 있는 유일한 향수 병 안에는 작약 꽃송이를 따서 넣은 진한 향이 들어 있다. 오월의 햇살이 가만히 숨죽인 어느 날 산속에 작약이 황홀하게 피어나는 에덴동산을 알고 있다. 때를 놓치지 말고 꼭 찾아가서 보고 와야겠다. 



일 년 열두 달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은 손아귀에 잡히지도 않고 이목구비 또렷한 생김새도 없다. 그때그때 꽃으로 나무로 구름으로 태어나서 피고 지고 사라져 버린다. 시간의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월과 오월, 꽃 속에 숨은 향기와 빛깔 그리고 자태를 가까이하는 이에게 시간은 아낌없이 기쁨의 선물을 준다. 


그 옛날 석공의 거친 손으로 시간의 모습을 새긴 석탑들은 파란 하늘을 쪼개어 관장하고 빗물도 탑돌이를 하며 에둘러 흐른다. 우리 몸속에도 시간이 흐른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는 시간의 형체들이 새겨지고 흩어지길 반복한다. 축복의 계절 봄이 만들어주는 시간의 선물을 많이 욕심내어 받고 싶다. 


내겐 땅 한 평 가진 게 없지만 마음속에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얀 조가비로 테두리를 만든 화단에 여름에 따다 먹을 가지 오이 고추 상추 토마토 모종을 심어놓으신 엄마의 손길을 언젠가는 따라 하고 싶다. 그 손길에는 요술봉을 든 행운의 여신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알알이 열매가 맺히는 마술을 부려놓는다. 비닐 포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바로 따서 먹는 신선하고 건강한 식재료를 위해서라면 밀짚모자에 피부 그을린들 뭐 대수랴. 


봄볕에 구워진 빵을 뜯어먹다가 갑자기 떡이 먹고 싶어졌다. 한 달도 더 되었다. 쑥이 들어간 초록색 쫀득쫀득한 떡을 씹고 싶다는 생각이 여러 번 스쳐 지났다. 빵은 버석거리는 일상에 커피를 곁들여 먹는 아침에 어울리고 떡은 쫄깃한 식감과 더불어 생각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오후 다과상에 어울린다. 잠시 허기를 모면케 하는 빵과 달리 떡에는 퍽퍽한 마음을 위안받는 정감이 들어있다. 배속에 넣어두면 쉬이 꺼지지 않고 든든하다. 산책 끝에 시장기가 돌면서 주변 떡집을 검색했더니 일요일에는 쉬는 집이 많은데 딱 한 군데 연중무휴, 그 집을 찾아갔다. 


실내등이 꺼진 듯 유리창이 컴컴하고 바깥에 내놓은 떡이라곤 안 보인다. 혹시 몰라 유리문을 슬쩍 밀었더니 안경 쓴 초로의 여인이 어두운 데서 얼굴을 내민다. 허름한 분위기와 달리 매대에 올려진 떡 색깔이 알록달록하다. 식감을 돋우는 이쁜 떡들이 하나씩 소포장되어 있다. 블루베리 두 개가 박힌 보라색 백설기, 딸기로 색을 낸 핑크 백설기, 찰시루떡, 콩고물이 듬뿍 묻어 떨어질락 말락 두텁떡, 주황색 호박오가리 밤이 박힌 영양떡, 쑥절편, 가래떡을 샀다. 하나같이 달지 않으면서 담백하고 입에 착착 감겨든다. 접시에 떨어진 콩고물을 남김없이 손가락으로 콕콕 눌러 먹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인데 자주 다니는 길 반대편에 위치하여 처음 가보는 떡집. 어두운 데서 나오던 안경 쓴 여주인장의 진솔한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이 동네 살아온 햇수가 몇 해인데 아직도 모르는 맛집이 숨어있었다. 모란에 감사해야 하나. 에너지가 빨려드는 모란을 보고 나서 시장기가 돌았었다. 강렬한 불길을 내뿜는 붉은 모란과 허름한 그 떡집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24시간 연중무휴 지친 떡집 여주인 얼굴에 모란 같은 생기가 새록새록 살아나면 좋겠다. 내가 단골이 되어 자주 찾아가 주면 어떨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데 천연색으로 봄 색깔을 낸 그 떡집을 만나려고 몇 달 전부터 허기를 달랬나 보다. 


오월의 봄이 마침표를 찍기 전에 어디 먼 데 훌쩍 다녀오고 싶다. 결론은 뻔한 걸 알면서도 권선징악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주는 자연의 동화 첫 페이지를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구독하고 싶다. 정원을 가꾸며 늙은 헤세는 언젠가부터 봄이 돌아오면 먼 도시로 떠났다고 한다. 새싹을 틔워 꽃을 피우려는 흙의 내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어서 빨리 흙으로 돌아가서 거름이 되라는 죽음의 메시지를 듣기 싫어서라고 한다. 죽음이냐, 부활이냐. 꽃의 두 가지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보기 좋은 떡은 먼저 다 먹고 다음날 남은 떡, 역시나 맛나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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