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우 Jul 18. 2022

이름값 하는 럭키 골드스타

- 바람, 바람, 바람

이른 더위를 먹은 쇠파리 한 마리가 장부에 앉았다 날아다니며 시선을 교란한다. 어디에서 양분을 빨아먹었는지 뒤뚱거리는 몸짓 사물의 용도를 탐색하는 듯 열기가 식지 않은 창문에 붙어서는 지이잉- 저음의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낸다. 날개를 달지 않았다면 단번에 내리치기 알맞은 굼뜬 동작 아니던가. 


가거라, 여긴 네 있을 곳이 아니란다. 기쁨 슬픔 그리움이 솟구친 감정을 편지로 주고받는 우체국이란다. 뜨거운 체온을 무심하게 두 번 접은 하얀 봉투 위에는 앉지 말거라. 네 다리가 델지도 모른다. 장마가 오려는지 초저녁부터 음습한 울음을 게워내는 개구리들이 우편물을 태산같이 쌓아놓은 남서기의 할 일을 부추긴다.      


우선 쇠파리부터 잡고 보자. 오늘 밤 숙직실에 저 쇠파리가 얼씬거리지 못하게 파리채를 찾아든 남서기 앞에 비스듬히 기우는 역광을 타고 형체가 불분명한 그림자를 드리운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 근무가 끝난 시각 출입문을 막 닫으려던 찰나였다. 그들 손에는 커다란 상자가 들려있었다. 화물을 부치려거든 다른 데로 가보시오, 이 말을 하려는데 “아유, 더운데 수고 많으십니다.” 이것 좀 구경해보라고 바짝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상자를 풀기 시작한다.      


잡상인들이다. 책이라면 전에도 한 상자 아이들을 위해 사두었다. 그만 나가줬으면 싶었다. 상자 안에서는 예상치 못한 물건이 짜잔 나타났다. 여태 구경해본 적 없는 첫눈에 반하고 말 물건이었다. 아담한 사각형 전면에는 새뜻한 흰색 플라스틱 망이 덮여있고 몸체는 이른 봄 풀색 자태가 고왔다. 몸통 속에는 새파란 바닷물을 들이부은 것 같은 팔랑개비가 걸려있었다. 그들이 기계에 달린 스위치를 꽂자 어느 신선 세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맺혀 끈적이는 땀방울을 일시에 식혀준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젊은 우체국 직원의 넋 나간 얼굴을 본 행상들은 목적을 달성한 만면에 웃음을 드리웠다.      


"선풍기라는 이 물건만 틀어놓으면 어떤 무더위도 저리 가라, 입니다. 콱 막힌 사무실에서 창문 너머 불어오는 산바람 들바람을 마냥 기다릴 순 없지요. 평생 효자 노릇 할 겁니다. 이 기회에 들여놓으세요. 후회 안 할 겁니다."   

   

그들이 제시한 가격은 ‘일만 팔천 원’. 70년대 초 책 한 권 가격이 400원, 금 한 돈에 이천 원, 라면 한 그릇 값이 20원이었다고 한다. 현재 책 한 권 가격으로는 40배, 금값으로는 100배 차이 나는 물가이다. 아버지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금 아홉 돈 값을 치러 그 당시 신통방통한 선풍기를 장만하고야 말았다. 시골 우체국 직원의 월급 절반에 해당하는 덤터기를 씌운 행상들은 돈을 받고는 줄행랑치듯 유유히 사라졌다.      



자그만치 나이 쉰 살, 잔고장 한 번 없이 쌩쌩 바람이 나오는 고향 집 선풍기를 칭찬합니다!



잘생긴 네모 선풍기를 본 동네 사람들은 우루루 우리 집에 몰려들었다. 

“이게 뭣인고?”

“부채만 부치는 줄 알았던 바람을 요 기계가 바람을 만든다고?”     


그때부터 선풍기는 마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흑백 TV도 우리 집이 제일 먼저 들였다. 주말 드라마, 축구 경기가 중계되는 날에는 우리 집 사랑방 빼곡히 이웃 아줌마 아저씨 동네 총각들이 자리를 메웠다. 그들이 슬리퍼를 찾아 신고 야밤을 틈타 사라진 방바닥에는 모래 먼지가 한 줌이나 쓸려 나왔다. 다음 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사람 몇이 우리 집에 다시 와서 짝을 맞춰 갔다.      


70년대 초부터 줄곧 바람을 부치던 그 선풍기가 나이 오십이 되었다. 내가 먼저 태어나고 우리 집에 온 선풍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제 내 나이를 뒤따라오고 있다. 지금도 파란색 날개 세 개를 쌩쌩 돌리며 잔병치레 단 한 번 없이 건강하게 저속 중속 고속 바람을 원하는 대로 불어준다.      


장수하는 이 선풍기 생김새를 살펴보면 우선 사각 형태부터 파격적이다. 70년대 디자인이라곤 믿을 수 없으리만큼 혁신적으로 잘 생겼다. 전면부 흰색을 제외한 올리브 그린 투톤, 요즘 LG 전자제품들이 앞다투어 생산하는 오브제 색상이 그때 이미 출시되었었다. 이 색상은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      


상단에는 이동 손잡이와 바람 세기를 조절하는 아날로그 다이얼 그리고 측면에는 몸체를 기울일 수 있도록 둥근 ‘화이트’ 고정장치가 달려있다. (색상 배치를 엄청 고려한 누군가의 흔적이다. ) 좌우 회전 기능은 없지만 앞뒤 상하 180도 고개를 움직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특히 누워있을 때 고개를 최대한 숙이게끔 각도 조절이 되어 시원하고도 바닥을 훑으며 낮게 불어주는 바람이 숙면을 도와준다. 고속 바람은 어찌나 센지 고속버스가 지나갈 때 옆에 서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막강하다.     

 

좌우 회전 기능이 없어도 이 선풍기 앞에 있으면 두 팔을 활짝 벌려 보듬어주듯이 시원한 바람으로 감싸준다. 고향 집 거실에는 그 이후 출시된 둥근 화이트 색상 선풍기들이 터줏대감 사각턱 선풍기에 밀려나서 앉을자리가 없게 되었다. 오직 사각형 바람, 이 바람만이 무더위를 한 방에 날려준다. 당시 금 아홉 돈이 아니라 열 돈을 줘도 아깝지 않은 골동품이 되어 자식들 떠나고 없는 빈자리를 대신해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는 효자 노릇 톡톡히 한다.      


물건도 이쯤 되고 보면 VIT 대접을 받을 만하다. 이 VIT는 춥다 덥다 안아달라 배고프다 칭얼대지 않는다. 어느 구석에 박혀 있다 언제 꺼내놓아도 제 본분과 역할 수행을 군말 없이 해낸다. 인간의 손을 거쳐 태어난 군자(君子)가 있다면 이 선풍기가 아닐까. 요즘 튼튼하다는 인버터 컴프레서가 내장된 가전제품도 무상 보증기간 10년이 지나고 나면 부품이 없다는 핑계로 폐기되곤 한다. 가전 회사들의 수익성 추구 때문에 수명을 단축시키는 전략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다. 초창기 가전제품을 만들던 장인정신이 지금은 실종된 것인지 궁금하다. 소비자들의 발 빠른 욕구 반영과 쉽게 싫증 내는 취향 또한 트렌드를 빨리빨리 변화시킨다. 오래오래 사용하는 물건이나 고지식한 사람도 구닥다리 취급받는 이 시대.


1970년대 불어온 바람과 2022년 불어주는 바람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노쇠한 바람을 가동하는 모터가 조금 더 소리가 날 뿐이겠지. 그 선풍기 앞에 앉아서 밥상 펴놓고 숙제를 하던 꼬마가 이렇게 변했으니 부모님 모습은 그새 노인이 돼버렸다. 신선 세계에 단 하룻밤 놀다 돌아온 속세와 마찬가지로.      


나는 선풍기 바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최대한 버텨보다 정 못 참겠으면 잠시 트는 정도이다. 버티는 수단은 부채이다. 대나무 살에 한지를 바른 커다란 부채로 훠이 훠이 새를 쫓듯이 자연 바람을 부친다. 팔은 노새 일을 시키면서 얼굴은 시원하게…     


아이들이 한참 어리던 2013년 여름, 경기도박물관에는 부채 기획전이 열렸다. 

전시 주제는 ‘오색 바람이 분다’.

옛 바람(고풍), 어진 바람(인풍), 맑은 바람(청풍), 아름다운 바람(미풍), 새로운 바람(신풍). 나는 과연 어떤 바람을 맞이하고 싶은가? 이왕이면 오색 바람 다 맞이하고 싶다. 여기 더해 즐거운 바람, 낙풍까지.

전시실 유리벽에는 옛 시가 소개되어 있었다.    



                 

여인에게 부채를 보내며     



한겨울에 부채를 보낸다고 이상히 여기지 마라

네 지금 어려서 어찌 알까마는

서로의 그리움이 한밤에 불이 나면

유난히 끓는 유월의 뜨거운 날씨보다 더 무섭단다 


         

- 백호 임제(1549~1587)          






2013년 경기도박물관 부채 기획전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의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