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우 Jan 04. 2023

실개천을 졸업하는 딸에게


2023년, 새해 나흘째 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정아,

축하한다!!

이제 엄마 품을 떠날 수 있는 때가 되었구나.

엄마도 그랬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부모님 슬하 떠나 서울로 올라왔지.

짐가방 하나 달랑 메고서.


수학여행 때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들어오며

불빛들이 쏘아댄 거대한 신기루를 보고서

시골 아이들은 함성을 질러댔어.

깜깜한 어둠이 실어 나르는 밤을 건너가야만

빛에 도달하는 당연한 진리를

거부하는 도시는 외계 행성이었어.

그런 낯선 도시를 향해 집 떠난 맹꽁이는 느릿느릿 길을 재촉했어.


근데 말이다, 쫄지 않았단다.

근거 없는 자존감이 든든하게 받쳐주었어.

어디를 가든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였다.

너는 도시에서 자라고 일찍 비행기도 타봤으니

좀 더 가볍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꽃씨를 태운 바람이 널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테니…


정아,

청춘은 나뭇잎 배에 올라타고서 세상을 두루두루

여행하는 거란다.

급류를 만나더라도 겁먹을 필요 없어.

느리면 느린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흘러가면 되는 거야.

뒤집혀도 괜찮아.

배를 갈아타면 되니까.

나룻배, 보트, 요트, 크루즈까지

네가 지불하는 요금으로 탈 수 있는 배는 많단다.


새해 첫날 엄마가 대학생 때 자취하던 동네를 우연히 스쳐 지나갔지.

천변에 놓인 다리 이름을 내비게이션이 말하는 순간

시간 목록은 이미 그 시절을 색출해내고 있었어.

친척 공무원 사택에 살았었지.

겨울철 연탄을 갈아 끼우는 허름한 집이었어.

춥고 배고팠었다.


그런데 정신은 어떤 감흥에 도취되어 있었단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일기를 쓰고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거의 매일 마을버스를 타고 언덕을 넘어 도서관으로 갔어.

해가 넘어가는 석양을 품은 그 도서관 널찍한 공간을 좋아했단다.

나를 구속하는 한계를 끊어내는 비상구를 가르쳐줄 거라 믿으며

타박타박 파라다이스를 향해 나아갔지.


한 그릇 500원, 가락국수를 사 먹으며

폐관 멜로디가 나올 때까지 공부했단다.

출출하면 100원짜리 동전을 삼키는 자판기 커피와 에이스 비스킷을 깨물어 먹었지.

오직 목표와 열정 두 개의 노를 저었지.

그 결과 국가고시에 거뜬히 패스

1차 필기고사, 2차 면접시험 수십 대 일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1등으로 입사하였다.


그 시절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줄게.

기말고사를 앞둔 겨울, 첫 전철을 타고

학교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알람을 맞춰두었어.

눈을 뜨니 시간이 너무 촉박한 거야.

정신없이 세수하고 가방 챙겨 컴컴한 새벽길

전철역으로 뛰어갔어.

길거리에는 나 혼자 뛰어가는 달음박질 소리만 들렸어.

헉헉대며 도착한 전철역 계단 출입구는 보란 듯이 셔터가 내려져 있는 거야.


허탈하게 뒤돌아서서 헌병이 총 들고 밤새워 지키는 길목을 다시 돌아가는데

너무 부끄러웠어.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일찍 착각한 거였어.

새벽 4시 50분쯤이었어.

집에 돌아와서 희뿌연 거울을 보니 세수하고 닦은 수건이 목에 감겨 있더구나.

그 모습으로 새벽길을 뛰어갔다 온 거였어.


입사하고 나서 아침마다 마주치는 타 부서 사람이 어느 날 말하더구나.

“혹시 OO에 살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자기 고향이 어디라면서 내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거든.

나는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대답했어.

“아니요.”

속으로는 깜짝 놀랐단다.

‘아니 내가 그쪽에 살았는지 어떻게 알고 있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난 눈곱만 한 관심도 없었거든.

얼굴이 희고 모범생 이미지 착하게 생긴 사람이었어.


가끔 궁금해져, 그때 그 사람은 어디서 나를 마주친 걸까.

아마 거의 확실한 건 내가 매일같이 가던 동네 도서관,

거기서 나를 본 걸 테지.

지금 같으면 웃으며 대답하겠지.

“맞아요, 어디서 봤죠?”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해.

나를 지켜본 한 사람의 시간과 그 속에 담긴 마음을 너무 가볍게 밀어낸 것 같아서.

그땐 왜 그렇게 모질었는지…


지금은 그 동네가 엄청 바뀌었더구나.

사택은 허물어지고 그 일대는 아파트 단지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섰더구나.

청춘은 그런 것이다.

배가 고파도 고픈 줄 모르고 한눈팔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가는 외길이란다.

너무 순수해서 서슬 퍼런 날이 자신을 겨누며 아프게 만들기도 하지.

날기 직전 내 몸에서 나온 실을 친친 감고서

골방에 웅크린 슬픔이 가득 찬 억압이기도 하지.


정아,

조금씩 네 등을 밀어내고 싶구나.

둥지를 떠나 서툰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보거라.

처음에는 두렵고 서먹서먹하겠지만

드넓은 자유, 시원한 해방감이 네 깃털을 감싸며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를 테지.

엄마가 가본 적 없는 세상으로

너는 그렇게 날아가거라.


3년 내내 마스크로 봉쇄된 학창 시절 보내느라 수고했다.

친구들끼리 졸업을 자축하는 저녁 모임이 있다면서.

가서 즐거운 시간 만끽하렴.

행운의 열쇠는 네 손에 쥐어져 있단다.

노력, 꿈, 열정, 희망이 아로새겨진 열쇠의 주인공이 되어라.

실개천이 흘러 흘러 망망대해로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렀구나.

힘차게 노를 저어라.

동창을 두드리는 새 빛 활짝 열려 네 길을 인도해줄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추억이 태우는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