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귀해진 코로나 시기, 깃털이 날아가듯 훅 떠났던 동유럽 여행을 리마인드해봅니다. 몇 년 전 가을 이맘때였죠. 자연과 문명이 조화로운 동유럽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그때 그 감흥을 새롭게 만납니다.
체코 비행기를 타고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하늘 비행길, 와인 한 잔을 마셔도 잠들지 않는 신경은 끝내 편두통을 부르고야 만다. 승무원으로부터 하얀 진통제 한 알을 얻어먹고서야 개운해진 몸으로 저녁 6시 반 프라하 공항에 사뿐히 내린다. 극동의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라시아 대륙 맞은편, 팽팽한 긴장감으로 똘똘 뭉친 공기층이 낯선 향기 캡슐을 톡톡 터뜨려줄 것 같았는데 익숙한 바람결이 푸근하기만 하다.
일행 중 똑같은 가방이 바꿔치기된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여 한 시간을 지체한 뒤 오늘 머물 숙소(CB ROYAL)가 있는 체스키부데요비체로 이동한다. 어둠에 묻혀가는 프라하의 불빛이 막대그래프처럼 요동치다 허물어지면서 깜깜한 길을 두어 시간 달린다. 빛이 없는 공간으로의 이동은 변별력을 상실한다. 잘 생긴 체코 청년 토마스 만이 우리의 행방을 쾌속 질주할 뿐.
그간 지독하게 아등바등 살지는 않았지만 명품 백 부러워하는 일 없이 검소하게 살아왔다. 40대 중반의 나이로 돈을 모으는 일에 여느 대한민국 중산층 사람들처럼 집중을 해야만 하는데 그 일이 시들해져 버렸다. 이 가을에 접어들면서 나는 난데없이 동유럽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과감히 실행에 옮겼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추억을 사기 위해, 호사를 누리지 못한 내 두 눈에게 상상만 해둔 뇌의 밑그림을 직접 보여줘야겠다는 불현듯 드는 각오를 누가 말리겠나.
젊음이 남아있을 때 멋진 사진을 남겨두고 싶었고, 지금이 아니고서는 퇴색되어 버릴 세상의 진면목을 아이들에게 또렷이 새겨주고 싶었다. ‘두 다리가 떨리기 전에 가슴이 고동칠 때 떠나라 ’는 말을 되뇌면서 여행 준비를 해보는데 왜 내 가슴은 흥분으로 떨리지 않는지. 출발 며칠 전 은행에서 유로화를 환전하면서 처음으로 조금 설레는 기분이 드는 정도이다. 아무도 몰래 심장에 무거운 납덩이를 매달아두었었나.
9시 34분 숙소 도착하여 닭다리 구이와 감자, 야채, 소면이 풀어진 엷은 수프로 늦은 저녁을 먹는다. 황금 빛깔 나는 체코 맥주도 곁들였는데 혀에 묵직하게 감겨드는 첫맛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사로잡는 맛이라면 권할 만하다. 오래된 곳간 열쇠처럼 세모난 나무토막에 걸린 철제 키를 열쇠 구멍에 넣어 살살 돌려서 다시 한번 끝까지 눌러주면 철컥 열리는 방문을 밀고 고된 몸을 떠민다. 가끔씩 지나가는 차 소리가 고향집을 연상시키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첫 밤을 우려했던 것보다 잘 자고 새 아침을 맞이한다.
아침 7시, 조식을 먹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자 1층 카운터에 주인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굿 모닝!" 인사를 건네고 식당으로 간다. 커피, 시리얼, 치즈, 햄, 플레인 요구르트, 빵(여행 내내 똑같은 아침 메뉴)을 담아 와서 잘 먹고 일어서는데 아까 뵀던 주인 할아버지가 식당에 와 계신다. 가벼운 목례로 잘 먹었다고 다시 한번 인사드리자 손짓을 하면서 따라와 보란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가자 놀랍게도 실내정원이 꾸며진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열대우림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넝쿨 나무가 유리천장을 덮고 있는 입구에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늘어뜨려진 줄을 잡아당겨 볼 것을 권유한다. 영문도 모르고 줄을 당기자 털북숭이 큰 거미 한 마리가 난데없이 벽을 타고 불쑥 내려온다. 깜짝 놀란 나는 “타란툴라?”라고 묻자 할아버지는 활짝 웃으시며 타란툴라가 맞다고 대답을 하신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줄을 잡아당기자 이번에는 좀 더 작은 새끼 타란툴라가 나무 넝쿨 가운데서 살아서 꿈틀대는 듯 숨겼던 몸을 확 내민다.
넝쿨 나무 몸통이 꽤 굵은 것으로 보아 이 실내정원은 꾸며진지 수 십 년은 돼 보인다. 장난기가 스민 할아버지의 웃음은 젊은 시절부터 탐험과 모험에 대한 호기심을 이렇게나마 살고 있는 집에 발휘하여 놓은 것 같다. 우리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고 짐을 꾸려 내려오자 할아버지는 엽서 한 장을 내밀면서 뒷면에 있는 이메일로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신다. 한국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로비 한쪽 벽면을 한복을 입은 한국 인형과 엽서와 사진들로 가득 꾸며져 있다. 얼마 후면 내 사진도 이 벽면에 부착되겠지.
잠만 자고 메마른 빵만 먹고 급히 빠져나가는 모습이 아닌, 웃음이 있는 인간애를 나눌 수 있어서 첫인상이 좋았던 체스키부데요비체. 나의 동유럽 여행은 일정을 다 마치고도 여행기를 작성하는 내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이메일을 쓰는 일로써 대단원을 장식할 것이다. 미소와 따스한 인사의 미덕만으로도 가로막혔던 언어의 장벽은 한순간 허물어지고 만다. 영어 단어 몇 마디 버무려서 웃음을 건네면 소통이 안 되는 경우를 지금부터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으니까. 사람 사는 곳에 사람 사는 도리를 안도하게 해주신 할아버지께 진정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