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연모하는 양치기가 살고 있으리라 추측해보는 산자락은 잘 깎인 소년의 뒷머리를 보는 것 같다. 저지대 침엽수가 검은 초록빛으로 무성하게 웃자라고, 산 중턱 초원을 가로지르는 하얀 실선을 따라가면 통나무집들이 외따로이 흩어져 산과 산 사이 마을을 향해 소식을 기다린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걸터앉은 고성들은 성 아니면 수도원이라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아찔하게 뒷걸음으로 달아난다. 한 시간째 매부리코 독수리 형상의 오스트리아 알프스를 지나 부쩍 부드러워진 산세가 동글동글 한국의 산들을 닮아가는 줄리앙 알프스를 관통하며 슬로베니아로 간다.
한때 유럽의 화약고였던, 터키어로 산맥을 의미하는 발칸반도는 유럽의 남쪽이며 지중해 동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땅덩어리로 산맥으로 둘러싸이고 아드리아해, 에게해, 흑해, 지중해로 고립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민족성이 강한 나라들로 이루어져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그중에서도 유고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티토에 의해 수립되어 존속하다가 티토 사망 후 1989년 동유럽 자유화 물결과 함께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이 대두되기 시작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공산당 서기장 밀로셰비치에 의해 촉발된 유고 내전을 거쳐 현재는 6개국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발칸반도 북서쪽에 위치하여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서도 1인당 GDP 2만 불이 넘는 잘 사는 나라라고 하는데 워낙 잘 사는 나라 오스트리아를 갓 넘어온 나로서는 그 겉모습이 확연히 구별된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오스트리아 목초지가 스테인리스 철판으로 만든 반짝반짝 광나는 미끄럼틀이라면 황량하고 거친 슬로베니아 목초지는 옹이 박히고 투박한 나무 미끄럼틀 같다. 농가 주택들도 어찌나 소박한지 검은 색채가 도는 세모꼴 맞배지붕 사이로 다락방이 보이고 흰 레이스 커튼이 드리운 창문은 몇백 년의 역사를 먹은 산증인으로 채택되어 최후진술조차 거부하는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검은 리넨 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중세의 여인이 우뚝 서서 고해성사하는 신비롭고 검박한 느낌은, 저 문고리를 붙잡고 들어가면 어두운 등불 아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집과 사람들의 인상은 일치하여 포스토이나 동굴 앞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상착의 역시 꾸밈이 없다.
내 고향 성류굴과 비교하는 포스토이나 동굴을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나지막한 언덕 아래 출입문을 들어갈 때만 해도 이토록 굉장한 지하세계가 얼굴을 감추고 있을 줄은 감히 상상조차 불허했다. 21km의 동굴 내부로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걸어서 이동하는 내내 이 어마어마한 지하세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의문이 줄곧 따라다닌다. 빛이 봉쇄된 암흑의 창조자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처절하고도 생경한 아름다움을 남몰래 새겨야만 하였나. 문명의 발상 훨씬 이전부터 지구 표면 위에 나타날 모든 형태의 미래 창조물들을 지하 암흑의 창작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그 의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천연 중의 최고 천연의 작품들이기에 인간의 손이 닿는 순간 검은 독이 오르는 석순과 종유석과 석주들, 석회를 품은 물 한 방울의 사랑은 백 년이 지나서야 1cm만큼 성장을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저 억겁의 세월을 보며 할 말을 잃는다. 이 동굴의 진정한 주인은 어둠이다. 어둠이 아껴두고 사랑한, 어둠을 밝혀주기 위하여 상앗빛으로 빛나는 샹들리에와 촛불들이 밤낮으로 꺼지지 않는 파티를 하는 이곳, 궁극적 화려함을 좋아하는 마법의 여왕이 살고 있는 여기 움직이는 생명체 인면어(프로테우스)가 산다. 빛이 없어 퇴화한 두 눈으로 동굴 바닥을 기어 다니고 하얀 알을 낳아서 새끼를 기르는 수명 백 년의 생명체. 삼킬 눈물조차 말라버린 더딘 움직임에 찬사와 감동과 눈물이 난다. 태양이 없으면 인류도 없는 지구의 내면에 인류보다 더 오래된 지구 생명체가 산다. 어쩌면 우리는 지구 외피에서 떨어져 나갈 연약한 존재들이다.
슬며시 여행객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슬로베니아의 매력 속으로 흠뻑 빠져들어 블레드 호수로 간다. 아담한 돔형 천장 내부에 붉은 염료로 칠한 프레스코 벽화가 아름다운 블레드 성에서 쇠사슬에 매달린 원통형 나무 두레박이 천 년의 세월을 길어 올리고 있다. 고성이 외벽의 각도를 틀 때마다 직사각형과 마름모꼴로 채색된 도형들이 낡고 뜯긴 벽체에게 주문을 외우듯 새로운 시간을 덧입힌다.
한 장의 엽서처럼 드리운 나룻배와 청둥오리가 나를 기다리는 호숫가에서 플레타나(pletana) 전통 배를 타고 고성에서 조망했던 호수를 건넌다. ‘손자(SONJA)’라는 이름이 붙은 내가 탄 플레타나는 정원 스무 명을 태우고 한 사람의 뱃사공이 뱃머리에 서서 두 손을 이용해 두 개의 노를 젓는 무동력 배다.
원목에 니스 칠을 하여 반들반들하고 고급스러운 등받이가 달린 이 배는 살구색 바탕에 예쁜 줄무늬가 들어간 차양막 덮개를 씌워놓았다. 세련된 흔들의자를 물 위에 띄워놓은 것처럼 편안하다. 선미 쪽에는 편백나무와 빨간 열매가 달린 나뭇가지들을 꽂아두어서 낭만적이기도 하다. 때마침 소곤소곤 내리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작은 동심원을 그리면서 수면에 파장을 일으키고, 어깨를 파묻은 고니와 내 마음에도 젖어 들어 닿을락 말락 말갛게 속삭인다.
왜 블레드 호수는 하찮을 수 있는 운송수단마저 고품격으로 제작하여 나를 흔들어놓는지 선량한 사공의 노가 이대로 멈추지 않기를 꿈꾸어 본다. 블레드 섬에는 15세기 성당이 생기기 이전부터 슬라브 신화에 등장하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 지바의 성지였다는데, 플레타나에 오른 내 몸과 마음이 신성한 의식에 정화되어 환상의 섬에 고요히 가닿는다.
자신의 욕심을 하나씩 지우면서 99개의 계단을 오르면 소원의 종을 치는 성모마리아 승천 성당이 기다린다. 어떤 욕심이 끼어들어 무리하게 줄을 잡아당기면 종소리가 울리지 않는 신비로운 종은 성당 내부에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뿐더러 종소리도 희미하다. 천장에 매달린 긴 줄을 의지해 가볍게 파동을 타자 맑은 종소리가 뎅-뎅- 울려 퍼진다. 바깥에서 더 선명해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시계가 귀했던 그 옛날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시계탑으로 오른다.
달팽이집을 연상시키는 나선형 나무 계단을 오를 때 유달리 환한 빛을 머금은 꽃들을 보았다. 계단과 계단 사이 층간에 연꽃문양이 투각 되어 있고 환한 햇살이 꽃잎 사이로 비쳐 들어와 발을 헛디딜 염려가 없다. 자연채광으로 꽃등불을 밝힌 계단이 그대로 작품이다. 시계탑으로 오르는 내 발걸음이 호사를 누린다. 묵직한 괘종을 매단 추가 정교한 쇳조각 톱니에 맞물려 정시를 타종하는 시계탑의 정점을 찍고 멀리 풍경을 내다본다. 시간을 관장하는 시계탑의 사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검은 현판에 새긴 시간의 명제들을 나에게 던져준다.
“즐거운 추억은 고통의 시간이 지난 뒤 사라지지만, 당신이 살아온 그 길은 당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가에 의해 분명해집니다.” “지구 상의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의 시간과 그 자신의 계절이 있습니다.” “LOOK UP TO THE HEAVENS AND THINK!"
내 운명의 모래시계를 채운 오늘 하루 모래 한 알이 흘러내리고, 이끼와 세월의 때가 낀 마리아 막달레나의 바로크 석상을 보면서 여성적이고 온화한 기운이 감도는 이 섬의 정취를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보히니(Bohinj) 호숫가 ☆☆☆☆JEZERO 호텔에서 맛본 양파와 방울토마토, 허브를 넣고 올리브기름에 볶은 입에 살살 녹는 문어와 진분홍색 베리 음료와 마른 꽃 놓인 청결한 식탁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