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 연안 오래된 미래

by 남연우
staticmap.png

-디오클레티안스 팰리스


대평원을 거느린 거대한 바위 산맥이 온순해지면서 구릉으로 잦아들자 그림처럼 고요히 잠든 회색 바다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계곡 사이 깊이 파고든 비좁은 수로로 새하얀 요트 한 척 미끄러져 지나가는 동안 저 미동 않는 물길이 바다라고(?) 꿈에서 본 나의 바다는 언제나 고요했다. 아득한 깊이에 침잠하여 가위눌릴 것 같은 사지를 퍼덕거려 간신히 헤엄쳐 건너던 그 바다, 아드리아는 꿈에서 본 바다가 맞다. 푸른빛으로 쏜살같이 달려와서 해안에 눈부신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는 철썩철썩 어깨를 들썩이며 읍소했다. 잠잠한 날조차 푸른 등 비늘과 갈퀴를 세워 잔물결을 일으키며 넘칠 듯 넘어올 듯 해변을 출렁였다.


내 고향 동해는 늘 움직이는 바다, 거센 돌풍이 수평선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친 바다, 기겁한 갈매기들이 날개를 접고 모래 품과 갯바위에 내려앉은 무서울 정도로 시퍼런 바다이다. 나는 그런 바다 곁에서 마음 졸이며 자라났다. 그런데 가만히 다가와서 머물러있는 정적인 기다림도 바다가 될 수 있다니 디나르 알프스의 뜨거운 심장을 천천히 식혀주는 지고지순한 아드리아해, 그 기슭에 얹혀사는 사람들의 성품도 유할 것이다.

아드리아를 만난 밤에 찾아든 고원의 도시 트로기르(Trogir).

호텔 6층 높이까지 자라난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나무 두 그루가 테라스 앞을 호위하며 밤바다의 전망을 두 편으로 나눈다. 반짝이는 조명이 해변의 야경을 호사스럽게 누비는 입지조건을 갖추고도 너무 조용하게 어둠에 파묻혀 있다. 굼뜬 불빛들을 바라보면 깜박깜박 졸리다.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말을 듣고서 일행과 함께 호텔을 빠져나온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따라 살짝 오르막을 올라가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어둠 속으로 꼬리를 감춘다. 바다는 가까이 있는데 길은 오리무중 통 다니는 사람은 없고 불빛은 영 인색하다. 밤 문화가 없는 이국의 밤은 적대적이고 우리는 향할 곳 없는 발길을 돌린다. 여름 성수기에만 운영되는 걸로 보이는 방갈로들이 음침하게 자리 잡은 길을 지나자 까만 어둠을 윤기 내며 닦고 있는 작은 열매들이 보인다.


길가에 늘어선 과실수들이 내 키 높이까지 가지를 늘어뜨렸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만져보니 연두색 대추만 한 크기의 올리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만나지 못한 아드리아 해안 컴컴한 골목길에서 압착한 기름과 염장한 검은 열매로만 보던 무가공 올리브나무를 만나서 너무 반갑다. 한 번 심어두면 아무 데서나 잘 자라고 병충해도 없어서 무탈한 올리브나무를 키우는 지중해성 기후는 바다를 목전에 둔 우리에게 시원한 바람과 함께 파도 소리, 밤바다의 체취조차 선물하지 않는다. 불러도 대답 없고 흔들어도 깨지 않는 바닷가 밀실, 움직이지 않는 밤을 더듬어 움직이는 유일한 그림자 넷이서 삐걱대는 문을 다시 열고 호텔로 속히 복귀한다.


DSC02731.JPG
DSC02741.JPG
DSC02742.JPG


아침노을이 번지는 아드리아 연안, 귀항하는 만선들로 활기찬 부둣가의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고깃배 한 척 건너갈 운명의 바다는 휑뎅그렁 빈 모습. 푸른 물살을 헤쳐 온 물고기 비늘이 펄떡이며 비린내 나는 치열한 삶터가 아니었다. 관조의 바다는 그들의 미적 부름에 충실하여 요트나 크루즈, 개인용 보트만 취향에 맞게 띄워놓았다. 간밤 나의 꿈을 지켜준 창가 두 그루의 나무는 측백나무과 사이프러스 나무이다.

나뭇잎은 편백 나무와 비슷한데 둥근 열매 모양이 사뭇 다르다. 진한 녹색으로 채색되어 좌우 대칭을 이룬 기다란 이등변 삼각형들은 크로아티아 남쪽 달마티아까지 황량한 언덕배기에 장승처럼 꿈쩍 않고 서서 강인한 인상을 심어준다. 죽음을 앞두고 우울했던 고흐에게 해바라기 다음으로 찾아온 자연의 벗 사이프러스는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길>을 그림으로써 죽을수록 살고 싶은 절박한 희망을 검은 불꽃처럼 타오르며 고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키 큰 야자수들이 이국적 정취를 마구 발산하는 백색 대리석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고향 달마티아 살로네에 서기 295~305년에 이르는 동안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공들여 지은 별궁이다. 은퇴 후 기거할 별장이었던 셈인데 로마의 속주 달마티아의 군인 신분에서 로마 황제가 된 그는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권력을 계승시키고 70세 목숨을 다할 때까지 이곳에 거주하며 양배추를 기르는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고 한다. 두 번째 임기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 그대의 황제는 … 나더러 이곳의 평화와 행복을 다른 것과 바꾸라고 감히 전하지 못할 것이오…”라고 전해진다.


20151006_082559.jpg
20151006_082605.jpg
20151006_082907.jpg


십자로가 가르는 네 구역으로 나뉜 직사각형 궁전은 가운데 열주광장을 중심으로 고색창연 옛 건축물들이 허물어지면서도 완강히 천칠백 년의 생존을 지속해오고 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자유로운 기질을 반영한 듯 검은 이집트 스핑크스가 지키는 삼엄한 경계구역을 제외하면 백성들이 궁전 안에 살도록 허용된 공간은 그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도 사람들이 거주하고 상업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터전이다.


마치 옛 거리를 재현한 세트장에서 영화를 찍는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데 오히려 실제 상황이어서 더 자연스럽다. 우리의 목조문화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여서 놀라울 따름이다. 이천 년이 다가오도록 후세 사람들의 삶터이자 생활 방편을 마련해준 옛 현인의 지혜와 덕성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 먼 미래를 내다보는 황제의 심중에는 애향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겸양의 마음 그리고 철두철미한 예지력이 더해져 퇴색되지 않는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현존한다.


20151006_083244.jpg
20151006_083030.jpg
20151006_083033.jpg


빛바랜 상아색 대리석에 새것처럼 짜 맞춘 상큼한 초록색 문들, 돌벽 틈을 파고들어 화사한 자주색 꽃들, 스플리트에 자생하는 라벤더 향기를 파는 가게, 푸른 바다와 하얀 궁전을 그리는 화가, 이미 윤나고 광나는 대리석 바닥을 자동으로 걸레질하는 청소차, 개방형 돔 천장 아래 탁월한 음향효과 덕분에 6인조 남성 합창단의 아카펠라 하모니를 완벽하게 재생해내는 원형 황제 알현 공간… 볼거리, 들을 거리, 즐길 거리 가득한 여기는 오래된 미래다.


20151006_083939.jpg
20151006_084202.jpg
20151006_084450.jpg
20151006_083730.jpg


궁전 동문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생생한 현지 수확물을 내다 파는 시장이 펼쳐진다. 크로아티아 국기를 연상시키는 빨간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들어간 네모난 차양막 그늘에서 싱싱한 지중해산 야채와 과일들이 색 고운 빛깔로 활기를 띠며 손님의 구미를 잡아당긴다. 모양 좋고 잘 포장된 우리네 상품과 달리 작고 볼품없으나 막 따와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무농약 과일들을 여행객 신분만 아니라면 장바구니에 그득 담아 가고 싶다.


하얀 순면에 보라색 라벤더 꽃이 수 놓인 예쁜 향주머니와 말린 무화과 한 봉지를 할머니에게서 산다. 달러 지폐가 낯선 할머닌 옆 가게 아저씨에게 이 돈을 받아도 되는지 물어보곤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는 해프닝이 재밌다. 생화가 생필품이 되는 현지인들 취향 때문인지 장미 백합 처음 보는 향기로운 꽃들이 즐비한 시장 어귀를 돌아 항구로 나오니 대형 크루즈 선박과 내가 탈 버스가 나란히 기다린다.


20151006_085731.jpg
20151006_085330.jpg
20151006_085545.jpg
20151006_090315.jpg


오늘 점심은 아드리아 해안 20km만 간신히 바다로 숨구멍을 틔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네움에서 먹는 해물 리조또이다. 수분기 많은 질퍽한 밥알에 조갯살과 자연산 홍합이 동 비율로 섞여 있다. 해물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딱인데 아이들은 먹는 둥 마는 둥 반 이상 남긴다. 밥 차려주는 여인은 포근한 웃음을 띠며 그런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준다. 이곳에서 오늘 하룻밤 묵는 보스니아 해변이 참 매력적이다.



20151006_091610.jpg
20151006_093411.jpg
DSC02754.JPG


트로기르



발칸반도의 하루를 숙성한 와인빛

석양의 도시 트로기르


해안선에 깜박깜박 굼뜬 불빛들이

무거운 걸음을 뒤따른다


밤의 통로를 따라가는 언덕길은 두 갈래

초록색 여권 소지자를 안내하는

이정표는 영 인색하여


꼬리를 감춘 길은 친절하게 걸어 나오지 않고

그 흔한 반짝이 조명, 뽕짝 멜로디 품귀한

야간출입금지구역


우왕좌왕 포개지는 그림자들끼리

밀실에 갇힌 해풍을 따라잡지 못한다


전력 사정에 익숙해진 어둠을 윤기 나게 닦는

올리브 열매들은, 이 밤의 수호천사

엑스트라 버진 오일의 원조를 손끝으로 만져본다


검은 우산을 펼쳐 든 야자수 아래에서

밤비 스친 귓등으로

고원의 수도원 종소리 울려 퍼지고


암녹색 불길로 타오르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기도하는 성자처럼, 우뚝 서 있던

트로기르





이전 05화대평원의 외로운 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