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르, 자그레브
_자다르, 자그레브
여행 6일째 빵가루와 먹이를 폭탄 투하하고 온 어항 속 구피들은 잘 지내는지, 현관 앞 신문이 쌓이고 있진 않은지 집 생각이 밀려온다. 반 토막 난 수면 부족과 저질 체력이 걷고 구경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 먹는 음식도 부실하여 방전되기 시작한 내 모습은 피사체로서도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실은 지중해 문명의 꽃 두브로브니크에서 눈먼 내 감동이 새로운 약발을 듣지 않는다. 아름다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터인데 완벽한 아름다움 곁에서는 비교 대상이 초라하게 전락하고 마는 것을, 그럼에도 미묘한 차이점을 느껴보려는 두 눈이 아직 반짝거린다.
바다 오르간이 있는 자다르의 하늘은 빗물 투성이다.
파란 우산을 쓰고 추운 바닷가로 간다. 어릴 적 고향 바닷가 파도 소리를 기발한 아이디어로 재해석한 작가는 75m 길이로 제작한 해변 콘크리트에 35개 파이프를 심어서 파도의 밀물과 썰물의 조화를 소리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파도가 치는 오르간 연주를 귀 기울여 듣는다.
잔뜩 흐린 잿빛 하늘과 바다는 가라앉은 내 기분처럼 음울한 소리를 낸다. 워낙 파도 같은 파도가 치지 않아서 사람의 손길로 음향효과를 유발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낮게 읊조리는 남자의 바리톤보다 더 저음이다. 코트 깃을 세운 겨울 남자의 버림받은 뒷모습이거나 안개 낀 가을날 창가에 젖은 낙엽이 들러붙어 구경하는 줄 모른 채 펜을 들고 악보를 그리거나 글쓰기에 몰입하는 남자의 옆모습이거나 과천 현대미술관 ‘노래하는 사람’ 조각상과 목소리와 음정이 닮았다.
슬픈 허밍으로 쓸쓸한 바다, 누가 저 바다에 엎드려 우는 걸까. 문득 음향효과를 낼 필요 없는 푸른 동해의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내 가슴속 서늘한 절벽 그 아래서 번민하는 티끌들을 강타하고는 끝내 바른 사람으로 돌려세우는 저력 있는 파도 소리. 소리 내지 않는 아드리아의 깊은 울음을 그치게 하고 싶다. 태양이라도 반짝 나와 준다면 저 눈물이 마를 텐데….
로마시대 시민광장 포룸에는 흩어진 돌기둥과 파편들이 시간의 종결을 찍고 있다. 둥근 원형 기둥에 박힌 쇠고리가 쇠사슬을 묶어두고 죄지은 사람을 끌어다 죄를 뉘우치도록 만든 ‘수치심의 벽’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치명적인 수치심을 죄와 맞바꾼 대단한 현장이다. 바깥세상과의 격리를 해제한, 개방형 감옥인 셈이다. 죄악보다 무서운 수치심이란 비굴해짐을 증오하는 자존심이다. 자존심과 죄악의 판정을 저울질하는 양심의 거울을 잘 닦아야겠다. 참으로 실감 나고 무서운 고발장이다.
발바닥 아래가 다 유적지인 자다르 역사지구에서 발굴하다 만 유적의 잔해를 유리로 덮어서 보존하는 방법은 특이하다. 작은 내시경 카메라에 눈을 대고 지하를 살펴보는 것처럼 꼭 걷어내고 드러내어 우뚝 세울 필요 없이 이미 상처 받은 유적을 그대로 잠재우며 볼 수도 있어서 우리도 문화재 발굴에 활용하면 좋겠다.
감기가 오려는지 비 내리는 날씨가 으슬으슬 춥고 야속한 밤 침대에 누이고 싶은 몸을 이끌고 자그레브(Zagreb) 어둠 속으로 걷는다. 용병으로 가는 전사들에게 무사귀환을 바라는 스카프를 남아있는 여자들이 둘러준 데서 유래했다는 넥타이 원조 국가답게 쇼윈도에 진열된 넥타이들, 해바라기 꽃다발이 놓인 갤러리, 보석가게들을 지나 크로아티아와 자그레브 시 문장을 모자이크 타일로 완성한 독특한 지붕 ‘성 마르코 성당’에서 오늘 여정을 종료한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지붕이 인상적이지만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 제라늄 화분 두 개를 걸고 따스한 불빛을 내뿜는 가로등이다. 육각형 철제 디자인 속에서 빛나는 가로등 곁에 추운 몸을 가져간다. 잠시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마음이 밝아진다. 그때 그 순간 나에게 위로를 준 건 네오고딕 양식 화려한 첨탑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가로등이었다. 이미 굳어버린 역사 속 유적보다 현재 시점으로 소통하는 대상은 대단하고 거창하지 않으며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흔적들이다. 순간에 마음 내어주며 기꺼이 사라지고 싶다.
사흘 동안 환호한 크로아티아의 밤이 깊어진다.
휘황찬란한 오색 조명이 경박스럽게 반짝이는 도시의 밤은 지구촌에 널리고 널렸다. 자극적인 불빛에 이끌리는 속성들을 거부하는 헤르바츠카는 오래전부터 피워온 등불의 원형에 가깝다. 빵과 포도와 올리브가 있어 먹고살 염려가 없는 지중해, 살갗 터지는 고된 노동의 대가를 치러가며 차갑고 딱딱한 돌의 심장에 꽃과 사람 기하학적 문양을 돋을새김 하여 따스한 피를 돌게 하였다. 돌의 문명이 웃음을 거두지 않는 반석 위에 삶을 영위하고 지탱하는 강인한 사람들이 산다.
사람과 사람 사이 잔인한 경쟁은 시켜서 무엇하리.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공장을 가동하고 3교대 체인벨트를 돌려 지속성장 가능한 초일류 기업을 추구해서 무엇하리. 좋은 시절 일만 하다가 늙음에 이르러 퇴직당하는 국민의 경제 수준 GDP가 말해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계측하고 재단하여 폐허를 일삼지 않는 곳, 자연과 인간의 기본원칙에 충실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되는 곳, 가오리 절반을 세로로 잘라놓은 모습을 한 크로아티아, 사랑스러운 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