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
체코 청년 토마스는 지금 극도로 예술적인 운전을 하고 있다. 보스니아 네움으로 가는 길 스플리트를 빠져나온 버스가 바닷길을 바짝 붙어 달리다가 슬슬 경사진 오르막을 지나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자 해협이 갈라놓은 건너편 바위산 정수리가 내다 뵈는 아찔한 벼랑길에서 속도를 멈춘다. 일행들의 탄성과 더불어 버스 한 대 들어가면 꽉 차는 비좁은 터널 입구에서 기다란 버스는 각도를 틀어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무사히 통과한다. 그의 수고로운 기예 운전에 우리는 박수를 보낸다.
굳이 편한 고속도로를 놔두고 자동차 전용 도로로 우리를 이끈 것은 이 멋진 풍경을 꼭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청춘이 아니고서는 선택하지 않는 그의 멋진 배려 때문이다. 급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언제나 편안한 안락함으로 특급 기차에 앉아있는 기분도 최신 엔진 성능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여행 9일째 기사가 바뀌었을 때 드디어 알았다. 그렇게 부드럽던 차가 덜덜거리고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리고 불편해짐은 임자를 잘못 만난 때문이라고.
아드리아해를 따라 내려온 크로아티아 최남단 두브로브니크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달아오른 지중해 오후 햇살이 빨간 기와지붕을 달구는 이곳. 파일게이트를 걸어서 280m 대리석 거리 플라차에 두 발을 들여놓는다. 7세기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13세기 지중해 중심도시로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 성당과 수도원과 궁전이 보석처럼 꾸며진 두브로브니크는 대지진과 전쟁의 방아쇠가 당긴 참상을 딛고 강한 돌의 속성같이 굳건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며 존속한다. 자연과 인간의 공격을 동시에 받았음에도 상처를 회복하고, 자신의 모습을 지킬 줄 아는 자생력은 왜 ‘아드리아의 진주’로 불리는지 스스로 증명해 보이며 진주의 눈물자국마저 아름답게 남아있다.
유럽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강력한 요새 성벽 길을 걷는다. 해안선 도처에 널린 너럭바위 위에 강력 접착제를 붙여 만든 것처럼 보이는 성벽은 견고하여 길 위에서 동상이몽을 꿈꾸는 사람들을 싣고 천연 요새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파란 바다와 대비되는 붉은 지붕들은 샐비어 꽃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으면서도 멀리서 바라보면 성벽을 따라 핀 덩굴장미의 빨간 열정을 닮아서 하얀 대리석이 피워 올리는 지중해 문명의 꽃이라 할만하다. 아드리아 바다는 잠잠하지만 거친 돌산 아래 높고 낮은 암릉으로 뒤덮인 비호감적 괴팍한 해안선을 지켜본 그 옛날 누군가의 날카로운 눈매는 단점뿐인 이곳의 지형을 장점으로 극대화했다. 바다로부터 진입 불가 구역을 성벽으로 만들었고, 부족한 물자를 탓하는 대신 이웃 나라와의 교역으로 번성을 누리도록 변모시켰다. 도저히 가다듬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성정도 어떤 뛰어난 사람의 가르침에 의해 변화되고 고귀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구시대의 유물과 단단히 결합된 현재진행형 삶터임을 알리는 증표들이 드높은 창가 고리로부터 성벽까지 연결된 빨랫줄에 처연히 매달려있다. 까마득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빨랫줄은 다가올 미래의 시간까지 뻗어있는 고래 심줄 같기만 하다. 갈퀴가 달린 막대기로 빨래를 수거하는지(?) 아찔한 높이를 감당하는 일상적 행위에 현기증이 도진다. 고공을 횡단하는 줄은 잡아당길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자유자재로 옷감을 걸고 핀까지 집을 수 있는 여유를 부려놓았다. 천연덕스럽게 널린 C컵 브라를 사람들은 느긋이 감상하며 지나간다. 성벽과 키를 겨루는 대추야자나무는 지중해 햇살을 한 움큼씩 익혀놓았고, 구멍 뚫린 포혈 사이로 검은색 화포가 바다를 향한 가상의 적을 겨눈다. 파도가 없는 해변의 유일한 물결은 한 방향으로만 성곽을 도는 인파다.
한가한 비둘기들 쉼터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은 사자왕 리처드가 십자군 원정 때 풍랑을 만나 근처 로쿠롬 섬에서 무사히 피신한 일을 계기로 지어졌다고 한다. 20km 밖에서 물길을 끌어와 만든 16면 형 오노프리오 분수, 주변 산지에서 나는 온갖 허브와 약초로 화장품과 약을 제조하는 약국이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 베네치아와 교역한 도시국가답게 눈금자가 새겨진 올랜도의 기둥, 유고 내전 때 희생당한 크로아티아인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미술관으로도 사용되는 스폰자궁 건축물들이 인상적이다.
현지 터프가이의 지그재그 곡예운전에 몸을 맡긴 채 시가지와 해안선을 한눈에 굽어보는 스르지산에 올랐다. 멀리서 바라보면 멋있기 그지없는 돌산의 정체를 가장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다. 이 빠진 칼날처럼 제멋대로 쪼개져 삐죽이 모난 돌들의 파편이 막 굴러다닐 것 같은데 꼼짝 않고 지표면에 붙어있다. 거대한 자석이 철광석을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걸까. 금방 낙석이 되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바위 아래조차 태연히 터를 잡고 있는 집들이 이제야 이해된다. 이동하는 동물들의 습성을 보호하기 위해 도로와 돌산이 만나는 지점은 아무리 끝이 없는 길도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다. 자연보호를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부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경제적 논리는 이 나라 정서를 들여다보는 세심한 흔적이다.
때마침 돌산에서 노니는 초식동물들의 순한 모습을 포착한다. 안전한 울타리가 쳐진 드넓은 세계에서 불상사를 당할 일이 없는 그들, 평생 보험에 든 거나 마찬가지다. 로드킬이 잦은 우리나라 도로 사정에 비추어 배울 점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빨간 지붕들은 아드리아 깊은 바다에도 가라앉아 있는지 정상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는 그 빛깔과 똑같은 산호석(coral) 목걸이와 액세서리들이 요염하게 똬리를 틀고 있다. 아, 내 목에 감아보는 코럴 목걸이는 아직 내 정열을 능가하지 못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45도로 꺾어져서 합류하는 도로 진입로에서 맞은편 차량을 살펴주는 일행들의 “OK” 사인이 떨어지자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돌리는 핸섬 터프가이는 우리가 하차한 후에도 매너를 잊지 않고 경적을 한 번 울린 뒤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고 사라진다. 내려다본 시야를 떠나 바다로 직접 나가 성벽과 고도를 조망하기로 한다. 매끄럽고 경쾌한 돌길을 따라 모퉁이를 돌자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골목통을 울리며 들려온다. 오래된 건물의 부채꼴 계단 위에 앉은 해쓱한 얼굴의 한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애잔한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선율이 둥근 구슬이 되어 돌길 위를 구르고 내 마음속으로도 부드럽게 아무 저항 없이 굴러온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나마 연주를 듣는다.
그 흔한 동전 바구니도 두지 않은 그의 자존심은 지금 이 골목길을 흐르는 시간과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고대인들이 먹여 살리는 이 거리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무엇도 구하지 않는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움을 들려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물고기 그림이 새겨진 헤르바츠카 2쿠나 동전이 이번 여행이 끝난 후에도 내 지갑 깊숙이 남아있는 걸 보면 두브로브니크는 언젠가는 다시 올 나를 초대하며 기다리는 것 같다. 노화되어 사그라든 꽃잎이 여전히 향기를 풍기면서 추억 속 그리움을 되새기고 있을 그때를.
승무원이 따라주는 레몬 맥주 한 잔을 마시면서 아드리아 바다 위로 사뿐히 들떠 해안이 그려내는 이미지를 감상한다. 성벽이 끝난 후에도 바위를 점령한 축대는 계단을 만들어두고 세계 최고의 휴양지답게 고급 호텔들이 즐비하다. 파도와 친숙하지 않아서 제 색깔을 잃어버린 갯바위들은 갈매기 대신 티 테이블을 올려놓고 차나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 차지다. 언덕배기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을 비집고 암녹색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묘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풍경에 질서를 부여하며 꽂혀 있다. 누드 비치가 있는 로크롬 섬을 한 바퀴 돌아 항구에 내려서자 시가지 중심축을 따라 빗살처럼 길을 낸 골목에 어둠이 내려앉고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왁자지껄 골목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변신하여 테이블과 의자들이 쏟아진다.
발설을 금기하는 비밀을 품고 나그네 발길을 끌어당기는 골목들은 흡인력이 강하여 어디로 들어가든 길이 통한다. 오래된 기왓장에 그려진 그림들과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을 구경하고 나온 저녁, 지중해 밤에 묻혀 맥주를 한잔 들이켜 마시고 싶다. 단 하룻밤만 이 고대도시에 머물러 고대인들이 바라보던 그 별빛 그대로 눈 맞추고 싶다. 한나절의 첫인상으로 섣불리 말한다면 실례이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알아버릴 수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듯이 짧은 만남으로 황홀한 지중해 도시, 나에게 시간이 더 허락된다면 마성과도 같이 거부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쓸 테니 먼저 홀연히 떠나온다.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는 미풍만 있었더라면
양피지로만 구전되었을 두브로브니크
영, 바람이 없다
가고 오는 세월이 없다
입가에 눈가에 파인 주름으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두브로브니크
이보다 더 거친 돌산은 없다
이보다 더 단단한 요새는 없다
이보다 더 불친절한 해안선은 없다
이보다 더 건널 수 없는 해자는 없다
이보다 더 상처 입은 유적은 없다
멸시와 질시를 견뎌낸 몇 겹의 방패들이 관통상을 입었어도
고목에 튼 크낙새 둥지같이 해묵은 고대도시
오래전 사랑니 빠져버린 성곽에 속눈썹을 대고
고서 행간에 서린 신기루를 내다본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곗바늘이 철옹성에 갇힌 시간
금싸라기 지중해 햇빛이 고대인들의 혈액이 묻은
빨간 기와지붕을 덕지덕지 덧칠하고
일억 광년 늙은 별빛이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깎고 있다
자정을 기다려 지하 계단에서 걸어 나온 유골들이
녹슨 관절 쩔걱쩔걱 소리 내는 보행거리
골동품 항아리에 찍힌 장미 가시들이 궁전의 추억을
소환하는 두브로브니크에서는, 등 돌린
지금 이대로 사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