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원의 외로운 독주

by 남연우


staticmap.png - 플리트비체


오늘은 드디어 아드리아해를 만나는 날이다. 우리말 ‘아름다워’와 어감이 비슷한 아드리아. 아름답게 드리운 바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감으로 설렌다. 과거와 현재를 향해 반쯤 벌어진 문에 기대서서 몽환적인 눈길을 실어 보내는 슬로베니아로부터 뒤돌아서서 보히니 호숫가를 떠난다. 싫어서가 아닌 때가 되면 날갯짓을 서두르는 철새처럼 하루살이 나그네는 갈 길이 늘 바쁘다. 호수와 땅의 신선한 숨결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온통 우윳빛 안개를 휘감은 새 아침, 이파리가 처진 녹갈색 광활한 옥수수밭 전경이 안개 바다에 잠겨 이방인의 감성에 우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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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지기 전 씨앗을 다 뿌리고 농부는 타박타박 자신의 집으로 피곤한 다리를 누일 수 있을지 의구심을 돋우는 저 들판의 압도적 규모에 짓눌린다. 호미와 쇠스랑을 긁어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전답에서 지난여름 고추를 따느라 땀을 뻘뻘 흘렸었는데, 아이들 소꿉장난처럼 여겨지는 부모님 농사일에 한결 부담을 덜어낸다. 솅겐조약(유럽연합 회원국들 간에 체결된 국경 개방조약)에 미가입된 크로아티아 국경에서 여권을 꺼내어 HR 자동차 그림 스탬프를 숙제 검사처럼 긴장한 채 줄 서서 꽝, 받는다. 제자리멀리뛰기하듯이 단숨에 넘어온 크로아티아는 어떤 이야기들을 펼쳐 보일까.

허물어진 담장과 부서진 집들은 전쟁의 상흔을 증언하기 위함인가. 낡고 삭아서 붉은 기와에 검은빛이 스며든 지붕은 개보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지 의연하게 덮여있고 칠 벗겨진 벽체들은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서있다. 허름한 농막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농가주택들이 빠르게 창가로 치닫는다. 농업국가의 가벼운 외투를 돈으로 벗기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다. 고급 관광버스를 타고 그들의 빈한한 처지 속으로 무엇을 보고 가겠다는 건지 송구함이 밀려올 때 자본과 행복의 척도는 반비례한다는 것, 그들이 보전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 자연경관을 감사하게 감상할 것, 가치와 신념만이 개인과 사회를 평가하는 공정한 기준이 됨을 스스로에게 주지 시킨다.


‘이 좁은 소견이 착각임을 곧 알게 되는 나.’ 4시간 넘게 달린 버스는 빨갛게 물든 담쟁이넝쿨이 에워싼 식당 앞에서 멈춘다. 전통 꽃자수를 수놓은 검은색 조끼와 허벅지까지 옆트임 된 긴치마를 입은 인형처럼 생긴 예쁜 아가씨가 먹음직스러운 송어구이 요리를 가져다준다. 밑간을 하지 않은 담백한 맛으로 일부러 소금을 쳐가며 여기 사람들 주식인 감자와 함께 곁들여 먹는다. 식당 밖으로 나와 초지를 훑어보니 클로버와 씀바귀도 보이고 억새도 피어서 엇비슷한 위도에서는 토양의 습성도 비슷함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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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도착하자 햇빛이 조금 더 강하게 내리쬔다. 카르스트 지형 석회암이 침식하여 탄산칼슘 침전물이 쌓이면 저절로 둑이 형성되어 크고 작은 16개의 호수를 품고 호수와 호수를 잇는 폭포와 물길이 거침없이 흘러내리는 플리트비체. 물이 함유한 광물과 유기물의 종류, 햇빛의 반사 각도에 따라 하늘색, 밝은 초록, 청록색, 진한 파랑, 회색으로 물 빛깔이 다 달라 보인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은 물이지만 볼프강 호수의 내면을 직시하는 초록 물빛에 혼을 빼앗겼던 내 두 눈이 여기 물빛에 사랑을 고하지 않는다. 다만 물이끼를 양육하며 자유롭게 제 갈 길을 망설임 없이 나아가는 물길을 보면서, 인생행로를 저렇게 헤쳐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한다. 나에게 결여된 기상과 호연지기를 저 물길에서 배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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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물의 경계를 걷는 나무다리 말고는 어떤 인공 구조물로도 호수를 가두어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 자연 우선의 원칙이 허술해 보이지만 더 조심하게 되고 질서를 따르게 되는 이중 효과를 훌륭히 수행해낸다. 햇빛과 접선하는 드넓은 데는 청록색이고 산 그림자와 녹음이 우거진 데는 진초록색으로 채도를 달리하는 그 품에 안겨 노니는 두 부류의 생명체는 송어 떼와 청둥오리들이다.


수면 바로 아래로 유영하는 송어들은 천국이 따로 없고 포식자가 없어 보이는 청둥오리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디딘 사람들을 나무라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도도하기 그지없다. 물 밖에 나와 있는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빨리 사진이나 찍고 가라며 느긋하게 포즈를 취해준다. 누가 누구를 구경하는지 모르겠다. 길들임은 궁핍한 환경에서 먹이를 유인할 때만 먹혀드는 술수인 걸까. 상류로 더 올라가서 이렇게 유별난 물의 근원을 알아보고 싶은데 반쪽짜리로 끝난 아쉬운 하산 길, 물의 제국 플리트비체의 발 빠른 캉캉 춤을 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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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해를 만나러 다시 버스는 인정사정없이 질주한다. 어느 순간 풍경이 아주 달라지고 있다. 능선도 앉히지 않은 펑퍼짐한 산들이 줄다리기라도 하는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키가 부쩍 작아진 관목들만 듬성듬성 부지하는 황무지 평원이 가슴에 얹혀있던 묵은 체증을 단번에 날려버린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기이한 풍광을 망막에 현상하고 해석하는 시신경들이 뇌세포에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대지라는 이름으로 저렇게 생겨먹어도 되는 걸까. 저 땅에 비라도 내리면 걷잡을 수 없는 빗방울의 방황은 착지할 종착지를 찾지 못해 허둥대겠지. 그림자 짓지 못해 황송한 달빛은 평원을 두리번거리며 은빛 쟁반으로 차오르겠지. 하루해를 온종일 걸어서 저 분지를 횡단하는 태양은 황야의 이리라도 만나게 되면 반가워서 꼬리를 툭 치고 다급히 서산을 찾아 숨어들 테지. 하늘 가까운 구름은 또 어떻고, 뒹굴다 뒹굴다 보푸라기 이는 솜털들이 다 해져 뭉개져 버리겠지.


지난날 결 맺은 과오도 실수도 저 평원의 광막하고 너그러운 가슴에 엎드려 다 용서받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고원의 밤에 홀로 밤하늘을 마주하고 새벽 별이 될 때까지 고독한 명상의 시간 속으로 깨어있고 싶다.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는 기적적인 체험을 저 땅은 허락하리라. 고도의 비교 대상이 없어 더 막막하고 경이로운 대평원에도 사람들의 인가는 아주 가끔 외딴섬처럼 흩어져 있다.

황량해서 황홀하고 메말라서 푸름이 돋보이는 돌과 흙이 점철된 저곳에도 끈질긴 삶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들은 목축업과 약초와 양봉으로 생업을 잇고 단조로운 일과를 연명한 뒤에 뒤꿈치 갈라지는 평생의 한을 십자가 하나 단단히 붙들고 있는 거친 돌밭으로 영원한 안식에 든다. 평탄한 수레바퀴를 굴릴 수 없는 돌밭의 험난한 여정이여, 잠들게 하라.

숨 막히는 비경을 간직하거나 야생의 자연이 길들임을 거부하는 공간에 직면하면 인간들의 존속은 초라해지고 이성과 감성의 의구심은 사라지며 무기력해진 의지로써 숙명적 삶을 살게 된다. 자연이 길들이는 문명들은 문자를 남기지 않았으며 불가사의한 괴력만 증명해 보였다. 문학과 예술을 잉태하는 창조는 완벽한 곳을 싫어하여 결핍이 초래하는 부산물이다.


점점 더 본성을 드러내는 돌산의 괴팍한 성질은 예고편에 해당하는 대평원의 외롭고 긴 독주를 앞세운 후에 본격적으로 희멀건 바위산들을 등장시킨다. 대 지각변동의 잔재들이나 다름없는 석기시대를 관통하면서 저 돌무더기 틈바구니를 노란빛으로 물들이는 꽃들은 누구일까.

이른 봄날 피는 산괴불주머니 같은데(?) 오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스팔라토스(Spalathos)’라는 이름을 가진 꽃들이다. 바람도 불지 않는 이 고원의 적요함을 스팔라토스의 생존이 없었더라면 비정한 외계로써 정의해버렸을 텐데, 돌산을 위로하는 꽃들의 향연이 눈물겹고 아름답다. 지구의 이면을 보기 위해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떠나온 나를 초대한 건 아드리아해를 품기 위해 미친 듯이 열광하고 울부짖고 제 열정에 숨 멎은 ‘디나르 알프스’ 바위 산맥이다. 기대하시라, 이제 곧 뜨거운 바위산을 굴복시킨 아드리아해가 나타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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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원, 홀로 서다


등뼈 없는 산맥은 어디로 치닫는지

펑퍼짐한 산마루에 이 산과 저 산의 경계를

가늠하는 협곡은 없다

절반은 하늘 영역

그 나머지 절반도 고공을 떠받치는 고원

360도 지평선을 망막에 현상하는 시신경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대평원의 테두리를 따라 끈 풀린 보자기 매듭을

주섬주섬 다시 묶고 싶은데

광활한 찻사발 텅 빈 그릇으로부터

쓸모없음의 쓸모를 알지 못하여 고된 황무지살이


발톱 빠진 올리브 나무들은 굳은살 투성이

가난한 불빛이 그렁저렁 실을 잣는

붉은 지붕 오두막은 종일 외톨박이

사랑과 이별의 여정을 지나오며

눈물이 삼킨 돌밭 위로

마른 먼지 자욱하게 구르다 멈춘 수레바퀴는

탈골된 시간의 원심력을 상실하였다

뿌리처럼 갈라 터진 발뒤꿈치 한으로 눕는 터전

저 돌멩이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붙잡고 서서

영원한 안식에 들게 하라


* 쓸모없음의 쓸모: 무용(無用)의 유용(有用), 장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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