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식겁한 모노드라마

by 남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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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 먼저 떠오르는 나라 헝가리(Hungary)는 헝그리(hungry)와 달리 국토 대부분이 비옥한 평야를 드러내는 배부른 나라이다. 자그레브에서 4시간 반 이동하는 내내 누렇게 어깨 처진 옥수수 들판을 지난다. 놀랍게도 유럽 한복판에서 동양계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이 나라 아기들은 몽고반점을 타고나며 우랄 알타이어 계통 어순으로 말한다. 낮게 드리운 하늘과 지평선의 접점 너머 깃발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기마민족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주한 유목민들의 발 빠른 답습은 아니더라도 다뉴브강이 흐르고 네오고딕 양식 웅장한 건축물들이 잔뜩 흐린 하늘만큼 무거운 도시를 내리누르는 부다페스트의 모습은 잘 꾸며진 겉모습과는 달리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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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에 꿴 고추와 마늘이 걸린 채소 가게 근처에서 여행 중 첫 한식 비빔밥을 맛있게 먹고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 다뉴브강을 굽어본다. 산과 언덕을 배경으로 귀족과 왕족의 거주지 부다 지구와 강 건너 평지에 펼쳐진 상업지구 페스트로 양분되는 뿌옇게 안개 낀 도시는 사방팔방 녹색 숨통을 내어주지 않는 갑갑함으로 막혀있다. 세계적 명품 도자기 헤렌드 보유 국가답게 ‘마차시 성당’ 지붕은 촘촘한 세라믹 조각들을 붙여 만든 물고기 비늘 모양이 동양적 아름다움으로 뒤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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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조상을 상징하는 7개의 고깔 모양 어부의 요새를 걸어 나와 푸드 트럭 고소한 빵 냄새가 빗속을 파고드는 거리를 걷는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와 연합군을 이뤄 패망한 뒤 국토의 28%만 남았다는데 중세풍 건물들과 어딜 가나 조성된 청동 조각상의 위압감이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 틀에 박힌 위용으로 군림한다. 공산국가 중 제일 먼저 개방한 나라 헝가리의 철면피를 걷어내고 맨질맨질한 속내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다. 과연 보여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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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건국의 아버지 이슈트반 왕 동상이 교회 내부에 건재하는 성 이슈트반 교회로 간다. 성 이슈트반의 오른손이 봉헌된 신성한 오른손 예배당이 있는 성당은 50년에 걸쳐 완공된 정성에 걸맞게 황금으로 치장한 실내 돔과 벽면이 화려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헌금함에 1유로를 넣고 들어가니 신부님의 맑은 목소리가 실내 공간을 다스리며 방문객들의 잡음을 봉쇄한다. 깊은 산속 절이든 도심의 성당이든 깨끗한 마음들을 불러 모아 찬양하는 기도 공간은 스민 기운이 정화되어 우아하다. 성당 밖으로 나오니 적셔도 괜찮은 빗방울이 흩날리고 어둠이 성큼 걸어오는 거리에서 프랑스 루이 15세가 “이 포도주는 군왕의 포도주이며 포도주의 군왕이다.”라고 한 토카이 와인을 시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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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시기를 놓쳐 포도송이가 썩어갈 무렵의 것을 사용하는 토카이 아수 와인의 풍미는 독보적이다. 한 모금 살짝 들이키는 순간 혀끝에 착 감기는 화이트 와인의 단맛은 가볍지 않으면서 신중하고 약간의 쓴맛이 가미되어 체통 있는 미각을 뽐낸다. 심사숙고하듯 깊이 정제된 향에 혹하여 5번 와인을 집으로 데려가기로 한다.


서구인의 외모 속에 흐르는 동양적 정서 때문인지 헝가리는 자수 또한 유명하다. 식탁 유리 밑에 들어가면 딱 좋은 레이스 풍 꽃 자수들이 수작업을 거쳐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색색의 고운 실을 통해 다시 피어나는 꽃들은 시들 줄 모르는 화사함으로 만개하였다. 새하얀 광목에 핀 작약과 풀꽃 나비는 사계절 내내 어릴 적 벽장 가리개로 걸려있었다. 엄마가 처녀 때 수놓은 아름다운 규방 예술이 영영 사라져서 아쉬운데 우리나라가 아닌 유럽에서 전통성을 자처하며 대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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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밖으로 나오니 한 여인이 수놓은 테이블보를 들고 어둠을 흥정하듯 발품을 팔고 있다. 그 여인이 파는 어둠과 빗방울에 마음 약해진 나는 여인의 것을 살펴본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자기 어머니가 직접 만들었다는 거짓 진술에 연민을 보태어 사주고야 만다. 빨간 장미꽃이 조잡한 그 물건은 지금 세탁기 덮개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의 육개장 묽은 국물 맛이 나는 굴라쉬를 먹고 은은한 조명이 어둠을 장식하는 다뉴브강 야경을 지켜본다. 검은 강물 위로 반사된 불빛이 떠내려가는 강물을 붙잡고 제 자리를 지킨다. 굽이치는 강물에 요동칠 뿐 불빛은 그대로다. 나도 시간의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는 따스한 추억의 불빛을 켜두려고 이 여행을 떠나왔다. 올록볼록 물결이 데칼코마니 하는 거대한 도시의 밤은 시선을 교란시키지 않으면서 중년의 안정되고 기품 있는 얼굴을 마주 대하듯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음악에 맞춰 느슨하게 춤을 춘다. 나의 흐릿한 시야도 함께 흔들리고 있다. 이제 잠자러 갈 시간, 버스는 부다페스트의 깊숙한 골목을 헤쳐 숙소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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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서는 몰랐다, 이 숙소의 정체를.

직원의 안내가 끊긴 울퉁불퉁한 길바닥 위로 바퀴 가방을 굴려가며 본관 뒤편 한참 떨어진 어둑한 건물로 향할 때부터 이상했다. 좌우 비대칭 신발장 문짝이 기분 나쁜 소릴 내는 방안에는 높은 창문에 매달려 고리 떨어진 커튼이 축 처져서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고문이 자행되는 실험실 같은 욕실은 50년대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한다. 난방이 전혀 가동되지 않는 천장 높은 실내는 외풍과 한기와 적대감으로 가득 차서 최악의 삼류 여관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감기 걸린 아이와 피곤에 찌든 나는 오늘 밤 지낼 일이 걱정이다.


바깥보다 더 두꺼운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하고 냄새나는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긴다. 저벅저벅 걷는 위층 발소리, 실내 복도를 늦도록 활개 치는 외국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악몽 같은 밤,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다 우연히 잡힌 이국의 원치 않는 채널이 고장 난 채 밤새 꺼지지 않는다.


지금부터 치러질 실제 상황은 각본에 없는 것이어서 헝가리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사건을 재구성한다. 빨리 떠나고 싶은 널브러진 짐들을 챙기고 수척해진 얼굴로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손님은 우리 일행밖에 없어서 간밤에 쌓인 한숨을 내뱉으며 핸드백을 아무 생각 없이 옆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고 뜨거운 커피와 빵을 뜯어먹었다. 식사하는 사이 일행들은 거의 빠져나갔다. 염치없고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이 숙소와 어울리는 비대하고 불쾌하게 생긴 남자가 손님들의 빈 그릇들을 치우는 모습을 뒤로한 채 남은 짐을 가지러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 꾸려놓은 짐, 외투를 입고 방을 둘러보는데 가장 소중한 내 분신이 보이질 않는다. 아차, 겁에 질린 얼굴로 본관과 별채 사이 거리를 질주한다.


내 어설픈 연기를 지켜보는 유일한 관객은 오늘 떠날 로드뷰를 검색하며 담배를 피워 물던 토마스의 심상찮은 눈길이다. 여행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고 삼류 여관의 괴기스런 풍경이 나를 연극 무대 주인공으로 호출하고만 이 상황에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을 되뇌며 사건 현장으로 차분하게 접근한다. 휑하니 빈 식당 내가 앉았던 그 자리 있어야 할 가방이 보이질 않는다. 우리 가족 여권과 전 재산이 든 가방의 행방을 알아보러 어두컴컴한 주방으로 향한다.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남자에게 내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말하자 그는 혹시 이것이냐며 잘 치워둔 내 가방을 들어 보인다. 오, 그 순간 그의 얼굴 표정은 구세주였다. 지퍼를 열어 확인해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이다. 감사함과 함께 너무 놀랐다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그는 심심한 위로의 웃음을 지어준다. 방까지 다시 되돌아오는 길, 내 부주의로 민망하고 헛헛하고 기운 빠진 걸음이 아무 일 없는 땅의 견고한 질감을 재확인하려는지 느리고 조심스럽다. 큰 상을 받고 황송해서 무대 뒤로 내려오는 기분인데 혼자 찍는 모노드라마가 지독하게 가혹하였다.


애들 앞이라서 차마 발설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던 불평들이 삼류 여관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까지 묵었던 시내 호텔과 붐비는 아침 레스토랑이었다면 행방불명된 내 가방과 더불어 여행은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여행 떠나기 전날 밤 내 빨간 장지갑이 사라져서 헤매던 꿈이 예정된 각본이었다면 여행 7일 차 유일하게 호텔 미정으로 남아있었던 날 밤으로 배정된 시간과 배경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큰 공부를 한 셈이다. 생각해보니 성 이슈트반 교회에 1유로 헌금한 일, 싸구려임을 알았음에도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여인을 위해 8유로짜리 연민을 산 일이 축복이 되어 헝가리는 나를 위해 자비를 베풀어주었다.

휴우, 여행 후반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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