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밤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by 남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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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보헤미아 지역 남부 체스키크룸로프로 간다.

체코로 가는 길 싸늘한 햇살의 입김을 아프게 물들이는 올해 첫 단풍을 본다. 한국보다 2~3주 계절을 앞서가는 이곳의 오늘 날씨는 화창하다. 13세기 비테크 가가 자리 잡고 고딕 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여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건축 양식이 덧입혀져 중세 마을 특징이 잘 보존된 마을이라고 한다. 블타바 강변과 체스키크룸로프 성벽 사이 언덕으로 노랗게 물드는 가을 단풍이 마을의 붉은 지붕들과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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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밋한 벽을 용서할 수 없는 여기 사람들은 창문과 창문 사이 빈 공간을 아낌없이 최대한 장식해 놓았다. 입체감이 느껴지는 벽돌 그림을 바탕색으로 채색하고 그 위에 거울처럼 생긴 여백을 활용하여 인물 초상화를 그려 넣거나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었다. 가끔 벽체보다 튀어나온 창문 주변으로는 세상에서 이 창문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온갖 기교를 부려놓았다. 망토 다리 위로 건널 때 올려다본 천장은 또 얼마나 독창적인지 회칠한 벽면을 입체적으로 분할하여 띠 벽지를 두른 것처럼 꽃무늬를 그려 넣고 단풍잎 청동 조각을 붙이고 전등줄 위에도 빨간 꽃 그림을 그려두었다. 미학적 꾸밈에 온 신경을 할애했던 그들은 예술의 생활화를 일상적으로 영위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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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골목길을 따라 걸으면 체코 크리스털, 귀여운 마리오네트 인형들, 목각공예, 예쁜 패브릭 제품들이 여행객 눈요기를 즐겁게 한다. 어느 집 돌 아치 대문은 그 가문의 체통을 단 한마디로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나무로 양각한 여인의 가슴에 매단 쇠 문고리를 잡고 노크를 시도하는 방문객은 안주인의 고결한 성품을 훼손하지 않도록 각별히 옷매무새를 고쳐야 할 것이다. 맑은 가을날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동화 속 마을이 내 마음을 빼앗지 못하는 것은 물먹은 감성이 임계점에 이르렀고 마지막 여행 일정에 의해 조율되는 차분한 정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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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이 끼기 시작하는 오후 프라하에 당도한다.

바츨라프 광장에 이르니 저녁 6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천문시계 주변으로 인파가 몰려든다. 정각 6시, 천문시계 위 창문을 열고 12 사도가 돌아가며 얼굴을 내민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이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서는 공정하다는 해골의 메시지가 종을 울린다. 마지막으로 수탉의 외침 “꼬끼오”.

7시간 시차가 나는 한국은 다음 날 새벽 1시, 지금도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시간이 어디선가 타종되고 새 생명을 얻는 탄생의 기쁨도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때가 되면 문을 열고 나오는 시간의 심부름꾼은 시간표를 집행하는 슬픔과 기쁨이 담긴 봉투를 통보한다. 알다가도 모를 시간의 생리, 오고 가는 생과 사의 무한 반복, 윤회의 바퀴가 엄정하게 진공 우주를 굴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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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플라스틱 양동이를 엎어놓고 기가 막히게 정확한 박자로 리듬을 두드리는 드러머의 거리공연을 보면서 카를교로 향한다. 14세기 건축된 약간 S자 모양으로 굽은 돌다리는 건축가의 꿈에서 진흙에 계란을 섞어 반죽하면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다리가 될 거라는 하나님의 계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단 이 다리가 완공되었을 때 첫 번째로 건너는 생명체를 내가 데리고 가겠다고 예언하셨다. 건축가는 이른 아침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가서 먼저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아뿔싸, 다리 건너편에서 부인이 먼저 뛰어오며 축하해주었다. 끝내 하나님의 계시대로 부인의 목숨을 거두었다는 슬픈 전설이 서린 다리는 지금은 보행자 전용 다리로서 세월과 강물의 격동을 잘 견뎌내고 있다. 30개의 성인 상이 내려다보는 카를교의 저녁을 걷는다.


다리 중간쯤에 이르니 떠돌이 악사가 일인 오역 악기를 연주한다. 입으로는 하모니카와 나팔을 불고, 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등에 멘 북을 무슨 재주로 둥둥 두드리는가 하면, 페달을 번갈아 밟아가며 머리 위에 치솟은 심벌을 탱탱 정신없이 두들긴다. 이목을 홀딱 빼앗는 그의 기예를 한참 서서 구경하다가 걸음을 옮기자 어느새 어두워졌다. 어릴 적 졸린 눈을 비벼가며 엄마 손을 붙잡고 장터 유랑극단 구경을 하고 나서 울퉁불퉁 신작로를 걸어가던 어느 밤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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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예술가들의 개성이 넘치는 다리 위로 밤하늘을 나는 하얀 새들의 군무가 자유롭고 황홀하다. 손발을 묶은 생활의 굴레를 벗어나 훨훨 날아온 내 모습도 저러하다. 저 새들처럼 40년 이상 새장에 갇혀 퇴화된 날개를 달고 이 하늘 아래로 날아들었다.

굳어서 딱딱해진 날갯죽지가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이 들어갔지.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묻지 않는 낯선 세계에서 마음껏 여기저기 날아다녔지.

아주 오래된 돌 위에 앉아보고 초록 호수 위로 사뿐히 나래를 스쳐 향기로운 꽃들에게 다가가고 푸른 아드리아 바다 위로 활공하였지.

사람들은 친절하였고, 나는 기쁨에 겨워 골동품이 된 골목길에 가만히 서서 지금 이 시간을 경배하는, 해쓱한 수도사 눈빛 기타 연주자의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였지.

시간이 멈춘 듯했어. 나를 잊게 만드는 마법에 걸린 거야.


빙그르르 돌고 도는 오대양 육대주 수많은 세상이 깃발을 나부끼며 나에게 초대장을 발송하고 있어.

프라하 카를교에서 알게 되었어.

현실은 이상과 꿈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자유 그 너머 또 자유, 나를 구속할 수 있는 거미줄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단 지금보다 더 현명해지고 싶어.

명명백백 지혜로운 안목으로 통과하지 못할 어둠은 없어.

내 양어깨 아래 돋은 고운 날개를 잠시 접어둘 거야.

언젠가 내 가슴 고동치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면 다시 날아오를 테니까.

고요히 눈을 감고 바람결에 몸을 맡기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신비로운 아침이 두 팔 벌려 나를 맞아들이겠지.


다음날 꽤 쌀쌀한 아침 언덕길을 오르자 우뚝 선 프라하성이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본다.

전망을 굽어보려고 성벽으로 다가가니 붓이 아닌 조각도를 들고 프라하 시내 전경이 그려진 밑그림에다 물감을 투박하게 찍어서 명암을 덧칠하는 노화가에게 시선이 머문다. 노화가는 어젯밤에 본 카를교의 다른 이름이 찰스 브리지라고 알려준다. 듬성듬성 흰 수염을 기른 얼굴에 악의가 없다. 존 레넌 벽화와 물레방아가 있는 캄파 섬 그림이 맘에 들어 구입하고 그와 사진을 찍는다. 그는 동글납작한 얼굴에 아몬드형 눈매를 가진 내 딸아이가 아주 아름답다고 칭찬을 한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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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음하는 온천수로 이름난 카를로비바리는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때 도착하였다. 이미 그림자 져서 한산한 거리는 겨울이 다가오려는지 춥고 음산하다. 주둥이 긴 대롱이 달린 컵을 구입하여 미네랄 성분이 많은 온천수를 마셔본다. 우리나라 약수보다 톡 쏘는 맛이 강하지 않다. 따뜻한 온천수를 마시면서 한기를 누그리고 웨하스의 본고장에서 헤이즐넛 크림이 들어간 얇고 바삭한 뻥튀기 크기만 한 둥근 웨하스를 먹는다. 아주 맛있다. 지갑 속 동전을 긁어모아 또 사 먹는다, 오렌지 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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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출국 도장과 함께 종지부를 찍는 나의 12일 동유럽 여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가을이 다가오는 어느 날 문득 떠날 결심을 했던 동유럽 여행.

설레지 않는 마음을 탓하며 일상의 이동이라 생각했던 여행.

판도라의 상자처럼 미리 알지 못해서 더 감동적이었고, 그간 잘 걸어온 나의 길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선물을 이제 무사히 건너왔다.

보름달이 뜨는 달밤에 휙- 날아올라 암흑에 파묻힌 푸른 별 지구를 바라보듯이, 여행은 지구 속 외계를 경험하는 행위이다.

밤이면 밤마다 깜박이는 불빛을 켜는 나는 별이다.

우리는 모두 지구 위에 내려앉은 별이다.

내 별이, 다른 별에게 인사를 한다. 신호를 보낸다. 나 여기 이렇게 잘 지낸다고.

내 별자리를 잠시 비워둔 채 하늘을 날아서, 다른 별자리를 탐색하는 모험이다, 여행은.

물질의 원자 단위로 작아진 ‘나’라는 개체가 얼마나 표준화된 인간인지, 다시 돌아갈 나의 별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소중한 장미꽃을 그리워한다.


내 고향 동해 바다가 얼마나 짙푸른 사파이어 빛깔 영적인 안식처인지, 아름다운 해변인지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리의 차이만 있을 뿐, 생활은 여행이다.

내가 걷는 공원길 산길 호숫길 집안 먼지 낀 창가에도 눈길을 기다리는 새로운 반짝임이 숨어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섬세한 얼굴의 풀꽃들, 진한 감동을 주는 낙엽 편지, 하루에도 여러 번 달라지는 하늘 스케치, 하룻밤 새 자란 내 아이의 키, 초저녁 서쪽 하늘에 걸린 초승달, 거리를 지나가는 타인들의 기분 좋은 표정, 사막을 달군 모래바람이 눈 쌓인 설산을 지나 먼바다 파도에 실려 내 목덜미에 와 닿을 때, 나의 별빛은 더 반짝거린다.

늘 변화의 물결로 출렁이는 세상에 귀 기울여 듣는다.

새로운 진실을 발견해가는 나의 여행은 계속되고 있음을.

그 사이 구피들은 2년 동안 낳지 않았던 예쁜 새끼들을 낳아놓고 활기차게 헤엄치면서 집으로 돌아온 나를 환영해준다. 오, 고대도시 특급 호텔보다 더 아늑하고 포근한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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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10박12일 동유럽 여행에 동행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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