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디흔한 바람이라지만 바람은 의외로 까다로운 성정을 지녔다. 자신이 가고 싶은 언덕과 길목을 염탐하고 찾아다닌다.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반갑게 맞아주는 한옥 추녀 아래 풍경을 좋아하며 물 빠짐이 좋은 언덕 굳건하게 서 있는 참나무를 좋아한다. 후미진 골목이나 음습한 그늘은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 바람이 매우 예민하고 민첩하게 움직인다는 걸 알아차린 건 고향 집에서였다. 기역 자(ㄱ)로 꺾인 고향 집은 안방이 마당 쪽으로 약간 튀어나온 구조인데 동쪽 그 방 창문을 열면 바닷바람이 무성하게 자라는 들판을 훑어 불어와서 플러그를 꽂은 바람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 시원한 산들바람이 다른 방 창문은 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명랑한 바람은 댓잎에 부딪히는 걸 좋아한다. 촘촘히 우거진 대숲은 망사리 같아서 수시로 바람을 낚아챈다. 단단한 마디를 엮은 대나무는 깃발이 달린 맨 꼭대기 갈맷빛 바람개비를 걸어놓고 몽환적인 파도 소리를 낸다. 비바람이 불고 옅은 운무가 스며들면 대숲 바다는 밀물에 차르르 누웠다가 썰물에 바로 서는 일렁임을 되풀이한다. 무겁게 처진 어깨를 죽비에 내어주던 그 순간 천상의 새소리 들려왔다.
들숨에 옥구슬을 심호흡으로 굴리더니 날숨과 함께 순식간에 내뱉는 음률은 온갖 소음에 찌든 고막이 깨끗이 씻기는 청음(淸音)이었다. 우산을 쓰고 걸으며 새소리가 들릴 때면 걸음을 멈추었다. 휘파람새는 한 번의 고운 소리를 연주하기 위하여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시간이 5초 남짓, 기다리는 고요함이 안달 나서 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각은 뇌로 바로 연결되는 ‘외이도(外耳道)’라는 고속도로를 깔아두어서 전달이 빠르고 파급력이 세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면 파문을 그리며 가라앉듯 타인의 혀에 실려 던져진 돌멩이들은 심중에 가라앉기까지 숱한 불면의 밤을 거쳐 욱신욱신 아프게 한다. 여우비 잦아드는 숲길 고운 음색을 가다듬어 꺼내는 휘파람새가 불통의 회색 지대 내리는 빗방울을 가르고 있었다.
발아래 깎아지른 기암괴석이 푸른 물살을 달래는 새하얀 등대를 찾아갔다. 해안의 곶에 서서 깜깜한 바닷길을 밝히는 등대는 불을 끈 한낮에도 길 잃어 찾아든 이에게 잔잔한 수평선으로 살아가는 이정표를 가르쳐준다. 개구리를 닮은 등이 납작하게 생긴 갯바위가 흰 파도를 실어 나르고,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바다는 바람이 맵차게 불었다. 챙모자를 벗겨 가려는 해풍의 사나운 손길을 뿌리치면서 등대 전망대에 오르려는데 잠자리 한 마리가 비틀거렸다.
가슴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레몬색 줄무늬가 마디마디 새겨져 있고 초록색 헬멧을 쓴 왕잠자리였다. 처음 보는 이 녀석은 네 개의 프로펠러를 제어하지 못해 바닥에 휩쓸리며 날아가더니 벽에 착지하려다 실패하고 연신 저공 비행하였다. 등대 부근에서 녀석이 생존하는 방법은 풍속에 대항하는 몸집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나 보다. 왕잠자리의 불안한 비행은 천장 갈라진 틈새 콘크리트 균열에 더듬이를 붙이고서야 끝났다. 간만의 안식에 안도하는지 꼼짝하지 않는다.
나의 생존도 저러하다. 흔들리면서 때로는 고요히 가라앉는다. 오감에 의해 자극된 요동이 내부에 잠재운 먼지들을 심란하게 뒤흔드는 날에는 붙잡을 끄나풀이라도 찾게 된다. 나의 중심을 붙잡게 해주는 한 가닥 신념에 의지한 채 끼니를 잇는 찬밥 한 덩이 뭉근하게 끓이다 보면 봄날 아지랑이 몽실몽실 피어올라 시장기가 돈다.
바람 많은 바닷가 오두막집은 무거운 짱돌과 속이 빈 테라코타 항아리가 어울린다. 그 항아리에 향기로운 보랏빛 라벤더, 석양에 물든 금빛 억새 한 다발 곁들인다면 헤설픈 어느 저녁 기어오르는 땅거미 또한 포근한 위안이 되리라. 새벽 풀잎 끝에 맺힌 이슬방울의 응축된 힘을 고요라 불러도 좋으리.
고요함이 사무치면 정적을 깨는 들꿩이 수수밭을 헤쳐 푸드덕 날아간다. 뒤뜰 감꽃은 봄밤의 적요한 달빛을 타고 떨어진다. 소리 없이 흐르는 은하수가 따분해서 밤하늘 별똥별이 불꽃쇼를 한다. 어릴 적 날려 보낸 방패연은 지금쯤 어느 별에 닿아 있을까.
괌 북서쪽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은 정체 전선을 뚫으며 어디로 갈지 고민할 것이다. 강풍을 거느린 태풍의 눈은 잠잠하듯 흔들림과 고요함 사이 똑바로 나아갈 길이 보인다. 한두 차례 태풍이 지나가면 맑은 가을 하늘이 드러나듯이.
지난 7월 원고 작성, 올해 <시와정신> 가을호에 수록되었어요.
요녀석이 등대 부근에서 바람에 떠밀려 저항하던 왕잠자리예요. 무척 커죠.. 간신히 붙잡고 부동자세..
여기 대숲을 거닐며 휘파람새 소릴 들었어요
빗방울이 내리다 그치길 반복하였고
옅은 안개가 스며들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노래하듯
휘파람새는 청아한 목소리를 들려주었죠
대숲에 몸을 감춘 그 소리에 혹하여 가던 걸음을 멈추곤 하였답니다
백코러스 대숲이 흔들렸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