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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Oct 28. 2020

현대판 장화홍련

입춘 절기를 맞이하여 만물이 약동하는 기지개를 켜면서 봄맞이 준비를 하나 보다. 다정한 꼬마 둘이 햇살 바른 양지에 앉아서 병뚜껑은 접시로, 엄마 화장품 빈 통은 양푼으로 반찬을 썰어 담는다. 시든 배춧잎과 보송보송한 귤껍질, 빨간 사과 껍질을 차례대로 곱게 문구용 칼로 송송 자른다. 땔감을 장만해온 아버지의 손수레에서 오리나무 열매를 따고 자주색 긴 대롱 모양 꽃을 자르면 끈적끈적한 점액이 나오면서 특유의 향기를 퍼뜨린다.     

 

엄마가 된 아이는 정성스레 밥상을 차리고 아빠가 된 아이는 맛있게 냠냠 먹는다. 아이들은 짧은 겨울 해가 영원하지 않듯이 유년의 한나절 동안 누가 시키지도 않는 소꿉놀이를 정말 열심히 따라 한다. 영문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역할놀이는 훗날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기 위한 예행연습이다.     


지붕을 옹기종기 맞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에 봄이 한창 입김을 불어넣고 있던 2015년 3월 부천의 어느 가정집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농담을 개그맨처럼 잘하고 예의 바른 그 집주인은 대학교수이자 목사라는 직함을 가진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열세 살 자기 막내딸을 다섯 시간 폭행한 뒤 사망에 이르게 하고, 지금까지 시신을 집에 보관해왔다는 충격적인 뉴스 말이다.  

    

1남 2녀 아이들은 제각기 흩어져 살았다고 한다. 사망한 아이는 계모의 여동생 집에 거주하였는데 거기서도 자주 맞았다. 비빌 언덕이 돼주어야 할 아버지로부터 세상 끝 절벽으로 떠밀린 아이는 죽기 바로 전날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선생님을 찾아가던 아이의 발걸음은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으며, 선생님을 바라보던 아이의 눈빛은 얼마나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을까.      


아이는 끝내 이 이상한 세상으로부터 한 마디 위로도 얻지 못한 채 괴물이 사는 아버지의 동굴로 들어가서 다음날 싸늘한 주검이 되고 말았다. 설레는 꿈에 부풀어 아이돌 스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잘 생긴 연예인 오빠들을 흠모하는 동갑내기 딸을 둔 부모로서 더 마음 아프다. 문득 우리의 전래동화 <장화 홍련>이 떠올랐다.     


17세기 평안도 철산 고을에서 실제 일어난 일을 소설로 각색한 것이라고 하니 그릇된 부모에 의한 수난사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다른 점이라면 여자에 눈먼 배좌수였지만 자기 자식을 사랑할 줄 아는 분별심만은 남겨두었다는 거다.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없다. 남의 자식과 비교당하지 않게 비싼 학원 보내주고, 고운 옷 사 입히고, 험한 음식 안 먹이고, 최신 휴대폰까지 다 쥐여주면 좋은 부모가 되는 걸까.      


물질에 아쉬움을 모르고 자란 아이는 오만하고 겸손함을 잃기 쉬우며 없는 자의 슬픔을 모른다. 가진 편에 선 부모일지라도 의도적으로 약간은 궁핍하게 키워주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옳은 일이 될 것이다. 기형적으로 대졸 출신자가 많은 우리나라 교육체계는 경쟁 시스템이어서 순위에서 밀려나는 아이들을 너그럽게 봐주는 ‘여유’가 없다.      


기다리는 부모도 항상 조바심이 나도록 채근하고, 변덕을 부리는 못된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어른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각박한 현실의 틈바구니에 끼여 미래의 푸른 꿈나무들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웃음꽃이 피어나는 화목한 가정의 엄마,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보고 자란 부모님의 역할 그대로 아이들은 흉내 낼뿐이다.  

   

일부 기성세대는 아이들을 훈육함에 있어 말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수단은 ‘손’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말보다 먼저 나가는 손은 아이의 잘못을 순간적으로 처벌하고 아픔을 주는 무서운 도구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아이가 자기 잘못을 인지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반성하는 힘은커녕 분노와 반항심만 증폭시키는 처벌에 그치고 만다. 전통적인 우리 사회는 집집마다 ‘회초리 선생님’을 따로 모시고 있다. 나도 부지깽이 세대이다.     


해거름 지는 저물녘 배고픈 아이들은 신경질을 부렸다. 아궁이 불을 지피시던 엄마는 난리법석을 떠는 아이들에게 부지깽이를 들고 쫓아 나오셨다. 우리는 줄행랑치면서 대숲으로, 우물가로, 헛간으로 몸을 숨겼다. 동분서주한 엄마가 드디어 저녁상을 차릴 즈음, 엄마 눈치를 살살 봐가며 상차림을 거들고 다시 도란도란 모여 앉아 꿀맛처럼 꿀떡꿀떡 밥을 먹어 치웠다.

     

‘한’의 정서가 화병으로 자리매김 한 우리의 유전정보는 느긋한 기다림과 대화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조급증에 시달린 나머지 후유증처럼 일그러진 분노조절장애를 공유하고 있다. 출세한 지식인들의 고성을 지르는 횡포로부터 일부 어린이집 교사들의 아이들 폭행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어느 단면을 돋보기로 확대한들 예외가 없을 정도이다. 21세기, 부끄럽고 초라한 우리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자구책으로 CCTV를 매달아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가 되었다.   

  

대탈출이 불가능한 헬조선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에서 굴러오는 걸까. 겉치레에 불과한 외형적 몸집 불리기로부터 헛바람을 먼저 빼야겠다. 입춘(立春)의 봄이 바로 서야 봄기운이 완연해지면서 냉담한 겨울이 스스로 물러가듯이, 저마다 두 다리로 우뚝 서는 바른 사람이 되어야겠다. 가진 것 모두 내려놓고 벌거숭이 내 정신을 바른 사람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함량 미달’ 눈금은 되지 말아야겠다.  

    

부모는 매일매일 자신의 인격 수양을 통해 자식의 밝은 앞날을 본다.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에도 반성이 필요하다. 너무 퍼주어도 너무 부족해도 안되지만 가끔은 뒤로 물러나 자식의 순한 눈망울이 자신의 길을 나아가도록 지켜볼 필요가 있다. 오욕의 찌든 땟물을 벗겨내고 집집마다 환한 햇살이 비쳐 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야 무덤으로 향하는 소녀의 싸늘한 원혼이 이른 봄날 수선화처럼, 화목한 가정에 피어나서 사랑을 담뿍 받기를 기도드린다!     






**오늘 하루 자주 "징징~"거립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가을이 깊어집니다. 행복한 오후 보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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