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코인

by 남연우

이제 막 들어선 겨울 초입은 새로 꺼내 입은 코트와 머플러를 두르고 찾아간 지하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고는 책갈피를 휘리릭 넘길 때 나는 산뜻한 종이내음이 나. 하얀 입김 서린 추운 겨울을 읽는 건 언제나 새로워.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앙상한 겨울나무가 서 있는 창가에서 포근한 볕이 넘겨주는 책을 읽노라면 마음이 넉넉해져. 훈김이 오르는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시대를 건너온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인터넷의 방해가 없던 그 시절 순수한 사고와 깊은 식견에 도달한 통찰력에 감복하게 돼.


의미 없는 영상들에 시력과 시간을 빼앗기는 요즘 사람들의 사고력은 진화를 거스르는 퇴보 수준이지. 인간의 가용 에너지 총량은 일정해서 어느 하나의 감각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나면 나머지 기관들은 빈약해진다고 봐. 사고력도 그중 하나이지. 킬링타임 오락에 억지웃음 지으며 근원적인 질문과 고통을 외면하지.


그 자리를 발 빠르게 딥러닝 인공지능들이 채워가고 있어. 생각하는 것도 귀찮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은 인간의 몫을 대신하면서 말이야. 점점 시간이 남아도는 인간들은 무기력해지거나 고약해지겠지. 성악설을 믿는 일부는 해괴한 기계들을 작동시켜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게임에 몰두하겠지.


지금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 어디쯤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 지난여름 휴가지를 지나다가 커피 만드는 로봇 팔을 본 적이 있어. 두 개의 팔은 스톱 상태였고. 원하는 메뉴와 카드를 들이미는 순간 빨간 불이 들어오면서 한 잔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머리가 없는 팔만 휘적휘적 이리저리 움직이고 갈색 원두커피 물이 컵 안으로 떨어지고 뚜껑과 종이 홀더가 채워진 커피를 로봇팔이 내민다면 나는 놀라서 도망치고 말 거야.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메탈의 차가운 쇠맛을 느끼곤 씁쓸해하겠지.


가을을 간직하며 애써 핀 국화,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린 빨간 구슬을 보면서 위안을 얻는 12월은 한 해가 저무는 달이어서 더 따듯해. 일 년 열두 달을 12월 어느 하루처럼 알뜰하게, 엄숙하게 살 수만 있다면 후회가 없을 텐데 말이야. 아무 약속도 없는 첫눈이 내리고 쌓인 눈송이를 긁어모은 어느 식당 앞에는 이상하게 생긴 눈사람이 서 있었어.


주목 나뭇잎으로 눈썹을 만들고 동그란 병뚜껑 눈, 종이를 접어 끼운 무표정 입술, 노란 비닐봉지 고깔모자를 썼고, 붉은 양파망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지. 식당 주인은 그 모습이 또 심심했던지 초록색 비닐봉지를 눈사람 목도리로 한 번 더 감아주었어. 보통 눈사람은 중성적인데 이 눈사람은 누가 봐도 남성이었어. 그것도 나이 든 아저씨 모습이었어. 어쩌면 무료한 식당 주인의 자화상 아니었을까.


워터코인, 겨울 시작과 함께 너를 만나게 되어 반가워. 한여름 물가에 사는 너를 볼 수 있다니 정말 신선해. 작은 수련잎을 닮은 모습이 동글동글 귀여워. 어둑한 화원에 있던 너를 데려와서 화분에 담긴 흙을 털어내고 깨끗이 씻어 수반에 담고 조약돌을 깔아주었어. 며칠 사이 아주 작은 연둣빛 윤기 나는 잎이 송송 돋아나서 더 귀여워. 트래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고 행운을 기다리듯 이 겨울 은빛 수면 위로 물수제비 띄우는 너로 인해 기쁨이 샘솟고 있어. 모난 상황도 둥글게 돌아가기란 얼마나 인내를 요하는지.. 백 번 참고 마음 고쳐먹고 상대의 날카로운 창을 물로써 다스리며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지는 게 이기는 거란 걸 알게 돼.


며칠 전 베이커리 카페에서 아주 멋진 분을 만났어.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시선을 끄는 데가 있었지. 모시 느낌 조각보 개량 한복 치마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고 있었는데 온화한 줏대를 지니고 있었어. 흔들림 없는 단단한 의지가 그녀의 얼굴 근저에서 빛나고 있었지. 소금빵과 초록색 말차라테를 마시면서 주위를 서성거리는 그녀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닿았어. 마침 카페 내부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어.


도예가들의 작품, 퀼트공예가들의 핸드메이드 가방과 파우치들, 뜨개인형들이 진열돼 있었기에 작가인 줄 알았는데 만석 빈자리를 찾는 손님이었나 봐. 다 마시고 일어나자 그녀가 다가와서는 "다 드셨어요?" 하면서 활짝 웃는데 그 미소에 심쿵했어. 내 인생 최고의 베스트 스마일이었지. 구김이라곤 안 보이는 햇살같이 환한 비로자나불 미소라고나 할까. 그에 응답하듯 내 입꼬리도 싱긋 올라갔지. "네~"


수정 고드름을 녹이는 햇살 같은 그녀의 온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순간적으로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움직이는 걸 보면 대단한 내공의 소유자일 거야.

반생을 지나오며 자신에 대한 믿음,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 자연에 대한 친화력, 인생에 대한 관조와 철학이 어우러져 한 사람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부드럽고 지적인 분위기 아닐까. 나도 그녀처럼 우아하게 보이고 싶은데 말이야. 우린 정신적으로 비슷한 동족이어서 서로 통했는지 몰라. 예전에 누가 나보고 그랬었지. 개량한복을 입고 전통찻집 주인을 하면 잘 어울리겠다고.


수조에 갇힌 너는 무심히 이 겨울을 건너기 시작한 내게 싱그런 기쁨을 주고 나는 온라인에 갇힌 누군가에게 이 글을 쓰고 있어. 어딘가에 갇혀 소통을 갈구하는 우린 디지털 노마드이지. 글에도 온기가 있다면 누군가의 단단한 마음을 열 수도 있겠지. 따스한 입김으로 언 손을 녹이듯 얼음 장벽 너머 별빛을 깎는 눈빛이어야만 해. 찬 서리를 밟고 혼자만의 시간을 걸어가다 보면 얼음꽃이 피고 또 봄이 올 테니까.

워터코인, 그 시간 함께 해줄래?






image.jpg 워터코인, 귀엽죠?
image.jpg 남향 햇살에 겨울이 무색한 시클라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퇴락의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