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성의 겨울은 매일같이 눈이 온다. 자고 나면 무릎까지 쑥쑥 빠지는 눈은 매일 제거 작업을 해도 끝이 없다. 하루하루가 지루하다. 용초도 수용 때 제대를 원했다면 지금쯤 고향에서 편안히 지낼 텐데, 공연히 원대 복귀 궐기대회로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귀환 후 남한의 정세에 어두웠고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각 부대로 분산 배치하니 사기는 떨어지고 선후배의 계급 차이 등 자존심 상하는 문제로 복무의욕이 없다. 혼자 고민한다.
하루는 야간 보초병으로 밤 근무를 서게 되었다. 자정 시간 눈바람은 인정사정 모르고 매섭다. 차제에 동상이라도 입고 의병 제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군화의 끈을 풀고 양말을 벗었다. 발을 눈에 묻고 한참 있으려니 발이 화끈화끈 열이 난다. 발이 어는 것이 아니라 눈이 녹고 있다. 다시 눈 속에 파묻었지만 매한가지다. 동상을 입고서라도 제대하고픈 간절한 마음속에 겨울이 가고 춘삼월의 따사로운 햇볕이 봄맞이 준비를 재촉한다.
하루는 대대장이 부른다. 나를 간부후보생으로 낙점 찍고 현지 시험이 있으니 응시하라는 것이다. 나는 거절했다. 그러나 명령이니 응시하라는 것이다. 시험 당일 속초로 갔다. 간성과 속초 사이는 자동차로 멀지 않다. 시험장에는 10여 명의 응시자가 자리하고 있고 당일 시험 의제는 ‘전쟁과 청년의 의무’라고 기억된다. 이 논문만 합격하면 소위로 임관되는 것이다.
나는 청년의 순수함에 대해서 가장 먼저 말하고 싶었다.
“국가가 가장 아끼고 보호하는 대상은 그 나라의 어린이들이다. 어린이들은 미래를 열어나갈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새싹으로 저마다의 꿈을 먹고 맺은 꽃망울을 일정한 성장 시기가 지나면 아름다운 꽃으로 피워낸다. 청년은 그 꽃 피울 시기의 정점을 향해 도달하려는 사람들로서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한창 무르익고 있다.
한 사람을 성장시키는 데는 여러 사람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과 가르침이 필요하고 국가는 교육의 의무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과 확고한 안보를 실현시킴으로써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준다. 올바른 의식과 성실함, 책임감 등으로 인격적 소양을 함양하고 지식을 연마해나가는 청년은 개인과 국가의 사명을 동시에 완수해나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그 열정은 높고도 뜨거우며 순수하다.
불순한 의도는 항상 곁눈질을 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다른 사람의 피해를 모른척한다. 순수함은 자신과 타인의 삶을 동시에 존중하고 동일시하여 남의 고통에 민감하다. 따라서 순수한 청년은 이타주의를 지향하는 올곧은 재목으로 성장하여 우리 사회의 큰 일꾼이 되어 빈자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다. 또한 세계인의 시민으로서 활약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고향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듯 국민들도 자신의 영원한 쉼터인 국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애국심은 거창한 듯 들리지만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아서 표현되는 경우가 드물다. 국가의 최소 단위는 내가 지금 딛고 있는 영토이자 삶의 기반과도 같아서 물과 공기, 햇빛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생의 필수조건이다.
물과 공기, 햇빛 없이는 단 한 시간도 생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경계를 이루는 내 조국의 땅과 하늘이 어느 날 갑자기 적으로부터 침략당하고 내 이웃과 부모형제가 쓰러져 죽어간다면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절실한 나의 일이 되는 것이다. 의로운 청년은 나라의 근간이며 대들보이다.
혈기왕성한 청춘의 정결한 눈과 목소리는 정의감으로 똘똘 뭉쳐 행동을 개시한다. 위협받는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선을 향해 앞장서야만 한다. 이 당위성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위한 최선의 의지에서 비롯되어 어떤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는다. 꽃봉오리를 받치는 꽃대는 절대 목을 꺾는 법이 없다.
비바람에 꺾일지언정 전선에서 피 흘리다 죽을지언정 후퇴와 굴복 없이 생명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한 송이 꽃이 피우는 평화는 위대하다. 평화는 어느 날 문득 주어진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라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힘의 균형에 의한 의지와 노력의 과정이고 모든 사람들의 헌신적인 바람이다.
나는 약관 스무 살의 나이로 역사의 비극 6.25를 만났다. 출생 연도를 고르는 선택권이 나에게 없었듯이 우연한 때에 청춘에 이르러 자유를 만끽할 시간도 없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가장 최악의 조건인 전쟁을 만난 것이다.
위험에 처한 국가는 제일 먼저 청년을 불렀고, 나는 그 부름에 자발적으로 응하였다. 이름 모를 전장에서 뼈를 묻는 한이 있더라도 내 나라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충직한 의지는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한민족 청년들의 피에 새겨진 유전적인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적의 침략행위는 어떤 명분도 합리화될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의 배반이요, 오천 년 역사의 수치요, 원수의 광기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는 사명인 것이다.
우리 대한의 청년들은 용맹하고 예의 바른 선조의 후예들로서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진취적 기상으로 전투에 임하였고 이제 전쟁은 휴전되었다.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겨왔고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전우들의 녹슨 철모를 가슴에 묻은 지금 6.25 전쟁은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종료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다 죽는 것 그것은 고귀한 자유를 누리는 인간의 기본 권리이다. 빵보다 자유를 달라는 메시지는 동서고금 어느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유효하다. 나도 그 무형의 가치를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고 다행히도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의 방아쇠는 존엄한 생명들을 파멸의 잿더미로 묻어버렸고, 너무도 잔인하여 두 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다.
전쟁 그것은 청춘에 들어서는 문턱을 막 넘고 있던 철부지에게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우였으며, 인생의 험난한 바다를 향해 막 출항한 우리의 배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파도였으며,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무서운 뇌우였으며, 끝내 항구로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의 싸늘한 죽음을 물거품으로 남기면서 광란의 소용돌이를 멈추었다.
여린 꽃잎을 할퀴고 지나간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듯이 내 가슴속 트라우마는 유월의 장미보다 붉은 화인을 찍어놓았다. 그 희생의 대가는 헛되지 않아서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번영의 탄탄대로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대한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진정 자랑스럽다.
간혹 개인과 특정 집단의 이익을 국가의 실익과 명예보다 앞세우는 이가 있다면 불충의 죄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소탐대실의 흥정 잣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무조건, 무조건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것만이 국민 된 자의 도리이자 자격이다.”
글을 쓰는 논리성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 나였지만 내 학력이 걸림돌이 될 것이란 걸 잘 안다. 합격을 한다 해도 그 후가 문제이다. 나는 되는 대로 주제와는 다른 글로 회피했다.
결과는 뻔하다.
어느덧 3월 말이 되니 제대 신청이 나왔다. 나는 기뻤다. 갖고 있던 비상금으로 속초에 와서 사진을 찍고 제출했다. 한 달여 간의 시간이 흐른 뒤 4월 30일 자 제대 명령이 통지되었다.
이제는 군 복무가 모두 끝나고 사회인으로 새 출발하게 되는구나, 생각하니 앞날이 밝아온다. 드디어 4월 29일 제대 축하 회식이 시작되었다. 회식 장소에는 보급과 직원이 모두 동참했다. 4개월여 복무하면서 선후배 간 보급관으로부터 구타도 당했으나 모두 사죄하고 나의 제대를 축하해준다. 고마웠다. 다음날 석별의 정 나누면서 나는 원주에 있는 병사구 사령부로 가서 모든 절차를 마치고 귀갓길에 오른다.
4월 30일 대관령 고갯마루를 넘어오는 길. 피난 행렬의 서글픈 눈물을 함께 울어주던 장맛비 대신 산 정상과 골짜기에는 새하얀 눈이 내려 쌓여있었고, 길가의 진달래나무들은 분홍빛 꽃망울이 소담스럽게 맺혀있었다.
중간쯤 내려오니 진달래가 만발하였고 산을 다 내려오니 꽃이 지고 있다. 한 사람의 긴긴 생애를 산이 오늘 하루 다 살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대관령이 높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기후변화가 심한 줄은 몰랐다. 봄꽃 개화 소식은 보름 후쯤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들을 깨우러 갈까.
푸른 파도가 반겨주는 동해안을 따라 마음은 어느새 고향으로 치닫는다. 4년 하고도 9개월에 걸친 군 복무가 비로소 끝났다. 국가에 대한 내 모든 충성과 의무를 다 바친 지금 나는 자유인이다. 치열한 청춘을 관통한 총성은 멈추었고, 역사는 평범했던 스무 살 청년을 불러 질곡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도록 위대한 사명을 수여하였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이제부터 내 청춘은 나의 것. 인생행로를 헤쳐 가는 ‘암호명, 겨울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 아버지의 6.25 참전수기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느덧 노인이 되신 아버지께도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청춘이 있었습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을 수행했던 청춘 말입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그런 장면을
온몸으로 겪어낸 청춘,
꽃잎에 찍힌 화인을 평생 가슴앓이 하시면서
살아오신 현재진행형 청춘.
전장에서 뜨거운 피 흘리며 죽어간 전우들.
이북땅 만포진 시중에서
춘삼월 새하얀 눈 위에 붉은 피 쏟아내며
한맺힌 눈 부릅 감은 전우들.
그 몫을 대신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오신 영원한 청춘,
아버지.
사랑합니다!
북쪽으로 가면 분명히 만나는 땅
우리가 일상적으로 시청하는 TV, 드라마를
몰래 봤다는 이유만으로
총살 당하는
반세기 넘도록 자유를 감금당한
가엾은 동포들의 인권을 외면한 평화,
위장평화입니다.
무엇으로 진실을 덮을 수 있을까요?
춘삼월의 눈은 곧 녹기 마련입니다.
진실은 절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