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니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성년이 된 이후, 사기도 당해보고 큰 사고도 쳐보고 나름 세상의 밑바닥도 기어보았다. 주식 시장이라는 투전판에 뛰어들어 공포와 탐욕의 극단에도 가보았고,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치솟을 수 있는지 인간의 자존감이 얼마나 곤두박질칠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예측할 수 없이 불규칙한 파동 속에서 때로 울고 때로 웃던 지난 50여 년의 세월, 그 한복판에는 "사람"이 있었다. 나 자신과 내 가족, 지인들, 비즈니스로 맺어진 여러 사람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과 대중들, 정치인들, 외국인들이 나에게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들이 내게 주입했던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시각과 태도"는 내게 몸에 안 맞는 옷이 된 지 오래다. 어머니는 주야장천 내게 "착해야 한다"고 읊어대셨다. 혹시 하나 뿐인 아들이 험한 동네에서 어두운 곳으로 빠져들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셨기 때문일테다. "선생 말 안 듣는 놈은 인간 안된다."면서 조자룡 헌 칼 쓰듯 몽둥이를 휘둘러대던 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과도 절연한 지 오래다. 다소 굴곡진 인생유전 속에서 내 어른들의 지침은 세상에 통하지 않았다. 내 나름대로 세상과 사람을 읽고 대하는 방법을 경험으로 터득해 나가야 했다. 여기서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나의 생각 몇 가지를 조심스레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성인이 되는 나의 아이들에게도 차츰 잔잔하게 들려줄 참이다.
첫째, 착한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착한 사람은 "착한 아이 신드롬"에 걸려있기 십상이다. 또한 선량한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망측한 질병에 걸려있는 어른들이 꽤 많다. 착한 것은 타인의 기준에 나의 주체성을 복종시키는 일이다. 늘 남의 눈치를 보고 입의 혀처럼 상대방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은 바보짓이다. 남 좋은 일 시키다 버림받기 일쑤다. 근대적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이다. 개인의 자유와 독립, 주체성은 근대적 인간의 본령이다.
착한 사람들은 강한 사람에게 기대려 하기 마련이어서 혼자 힘으로 일어서기 힘들다. 작게 얽힌 실타래도 스스로 풀기 어렵다. 토끼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잡아먹히는 일 밖에 없는 것이다. 착한 사람들은 부조리한 것에 마냥 참는다. 참다 보면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한다. 결국 자신을 학대하거나 상대방을 악마로 매도하며 화가 폭발하게 된다. 착한 것은 죄악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결국 해악을 끼친다. 나는 늘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서 살아왔는데, 어떻게 바보 취급을 당해야 하나 하는 선량한 피해자 의식에 빠져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이들은 도덕적 우월감이 합리적 판단을 압도한다. 모든 것이 도덕으로 환원된다. 세상 일이 도덕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말장난 같겠지만, 착한 사람이 되지 말고 "선한 사람"이 되어라고 말하고 싶다. 진정으로 선한 사람이란 "현명한 사람, 친절한 사람, 결국 괜찮은 사람"이라 정의 내리고 싶다. 윤리적 계선이 분명해야 함은 물론이다. 만들어진 판의 모양새에 따라 판에 걸맞은 적절한 대처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관행과 이치를 꿰뚫고 있어야 내 다리로 우뚝 설 수 있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이 되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다. 현명한 판단으로 상대방과 판을 읽을 수도 있어야 하지만, 사람 좋은 친절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친절은 입의 혀처럼 아무러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의 요구를 몽땅 다 채워주는 행위와는 다른 것이다. 현명하면서 친절한 사람은 주위로부터 마냥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내공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수준에 도달하면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 일과 사람에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한다. "No!"라고 할 줄 알아야 한다. 예의 바른 거절은 미덕이겠지만 말이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괴물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 다만 내가 할 일은 다해놓고서, 만들어진 판세에 조응하는 현명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 부조리함이 일정한 선을 심하게 넘어 일정기간 유지되면서 자기 정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는 칼을 빼들 수도 있어야 한다. 선한 기초 위에 서있다면 현명한 갈등은 피할 일이 아니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이롭다.
둘째, 성선설을 버려라.
성악설이 나와 세상을 밝게 한다. 욕망과 이해관계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흔쾌히 인정해야 한다. 하물며 유전자도 이기적인 존재라 밝혀진 마당에 DNA와 단백질로부터 의식을 부여받은 인간의 이기심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유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선함 역시 흔히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무조건 주려 하지 말고 무조건 받으려 해서도 안된다. 세심한 비율로 주고받아야 한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시라. 배불리 먹으려 하는 상대방의 행동을 속물스럽다 비난하지 마시라. 나 역시 마찬가지이니. 이러한 전제 위에서 자본주의는 태동하고 무르익어 왔다.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도덕적인 존재가 아닐진대, 사회에서 도덕적인 잣대가 다른 기준들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면 세상은 망조가 든 것이다. 도덕국가론이나 평등주의가 그러하다. 도덕주의가 만연하면 도덕은 산으로 간다. 평등주의가 사회의 최상위 덕목이 된다면 평등은 개가 물고 간다.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억누르면 풍선의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게 마련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결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선함과 정의로움이 개인에게 이득을 안겨주었다는 경험이 세상 사람들에게 축적되어야 한다. 이것이 유인이다. 인센티브는 고래도 춤추게 한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로 등치 시켜 서술 전개한 것은 모자란 점이 맞다. 성선설을 주장해야 선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우리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여, 이기주의보다 좀 더 강한 말맛과 철학적 함의를 가진 단어로 성악설을 앞세웠다는 점을 널리 양해해 주기 바란다.
셋째, 세상을 단정적으로 재단하는 이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세상은 알 수 없다. 사람이 알아내기 힘든 무대이다. 나의 지식과 경험, 심지어 감각까지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늘 전제하고 살 수밖에 없다. 계속 틀리면 내 생각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어찌 일개인이 아니면 일개 학파가 최신형 슈퍼컴퓨터로 빅데이터를 취합하고 AI를 학습시켜 세상의 속내를 알아내려 해도 그 궁극의 복잡성을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현재의 세상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과거의 세상도 제대로 모른다. 미래의 세상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단언하는 이들은 바보이거나 사기꾼이다. 극상의 복잡계인 세상의 일들을 몇 마디 말과 글로 압축하여 단정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세상을 단정적으로 재단하는 것을 버릇처럼 하는 이들을 거칠게 분류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나름 세상의 상층에 위치했다고 자평하는 분들 중에, 어린 지도자가 있다. 어른에게 어리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말과 같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이에 해당한다. 자기 자신도 뭐가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대중을 팬덤으로 몰아가는 어리석고 무책임한 지도자이다. 자기 자신도 뭔지 모르지만 맞는 것 같아 대중을 토끼몰이해댄다. 이런 부류는 적어도 자기기만적이지는 않다. 다음으로 형세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 거짓으로 대중선동을 자행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은 자기기만적이다. 한마디로 사기꾼이다. 마지막으로 덛붙이자면, 일반적인 정치인과 조직의 수장, 중간관리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동원은 이들의 일상이다. 동원 없이 일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중들 중에 세상 재단하기, 세상 갈라치기에 골몰하는 이들도 있다. 패거리에 끼고 싶거나 중간 보스라도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이해관계에 약삭빠른 이들로, 그들의 재단 치수는 조변석개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작 안타까운 일은 착한 사람들이 이기적 지도자의 편향적 주장에 돈 대주고 몸 대주고 마음까지 내주는 일이다. 이들은 이기적 지도자를 추앙하며 삶의 위안을 얻는다. 내려 먹여진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착각하고, 몰려다니면서 타인을 공격하기도 한다.
영악한 이들은 돌아가는 판을 읽고 팬덤을 만들거나 이용하지만, "무지몽매한 착한 사람들"은 기획된 담론을 진리로 착각한다. "만들어진 종교"에 환호하며, 자신의 머리와 몸, 돈을 "종교 기획자들"에게 아낌없이 제공한다.
사상과 이념은 동원 체제의 소프트웨어다. 인간 세상, 뭉치게 하고 동원하는 일 없이 개인의 자유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사상과 이념은 사회의 필요악이다. 세상에 순수한 결정체는 없다. 세상은 균질한 회색도 아니고 그냥 온통 카오스적인 잡탕일 뿐이다. 세상은 사상과 이념이 말하는 "순수한 결정체들의 혼합물"이 아니다. 알 수 없게 꼬여있어 가닥을 잡아내기 힘들다. 그래도 세상 일을 하려면 동원해야 하고, 이론들은 필요한 사상과 이념으로 전화해야 한다. 사상과 이론을 빼놓고 "가상의 실재"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상과 이념은 불타오르는 늪과 같은 것이다. 사상과 이념을 대할 때는 까치발로 서서 잽만 날리는 것이 좋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 그나마 절대적 진리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는 언명은,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 뿐이다.
넷째, 세상 일을 바라보는 방식은 TOP-DOWN 방식이 위력적이고 효율적이다.
큰 틀을 먼저 보고서 아랫 단위를 파악하고, 커다란 그림 스케치를 먼저 해놓고 작은 붓질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근거 없이 부실한 기초 위에 전개되는 TOP-DOWN 방식은 기괴한 변종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늘 경계해야 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와 궤를 같이 한다. 그리는 큰 그림이 하부 세포들의 미세한 상호관계들을 포착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들을 유동적인 공간을 두면서 체계적으로 쌓아 올리는 BOTTOM-UP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TOP-DOWN 방식과 BOTTOM-UP 방식은 동전의 양면이다. 튼튼한 귀납 위에 올라선 연역만이 큰 일을 할 수 있다. 튼실한 TOP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BOTTOM을 튼실히 쌓아 믿을 수 있는 TOP을 축조해야 한다.
이를 구체적인 일처리 과정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을 하기 전에 , 일의 목적과 목표, 방향을 정하고 행동 주체의 능력과 자세를 판단하는 것이 먼저다. 다음은 만들어진 큰 얼개 아래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작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이다. 이 두 단계가 조화롭게 상호침투할 때, 일은 성공으로 귀결된다. 현재 팔란티어라는 AI 회사가 조직 운영에서 TOP-DOWN 방식과 BOTTOM-UP 방식을 높은 수준에서 융합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 영역에서의 TOP-DOWN 식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질문과 모색이 필요한데, 그 핵심은 공부다. 세상을 초보적이라도 알고서 일을 하려면, 기초적이나마 세계사 공부가 필수적이다. 정보의 바다를 제대로 움켜쥐려면 영어 공부 역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각 분야의 책, 세상의 동향, 살아계신 거인들의 목소리에 머리와 가슴을 열어야 한다. 길게 내다보고 넓게 또 깊게 바라봐야 TOP이 흐릿하게나마 그려질 것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TOP 만들기 작업을 지향한다면 상상력이라는 인공위성을 띄워야 한다.
다섯째, 향후 세상을 이끌어나갈 주역인 우리 젊은이들의 행보는 고무적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전근대적 인간형이 적잖은 비중으로 잔존해 있다.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물질문명의 발달을 정신문명이 채 따라잡지 못하고, 소득의 양극화로 근대/현대 문명을 계층 차별적으로 향유하게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개인들도 부문별로 불균등하게 전근대/근대/현대적 자아를 체현하고 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캐캐묵은 유교적 사고나, 전체주의적 사고가 아직 만연해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중년인 나의 속내에도 틀딱과 꼰대, 무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착한 아이 신드롬"이나 "성선설"로부터 자유롭다. 가정과 군대, 회사 등에서 주눅듦에 익숙한 기성 세대들의 감정 찌꺼기들을 젊은이들은 보기 좋게 깨뜨리고 있다. 패기 있고 발랄하여 이들에게 관행은 법칙이 되지 못한다. 돈과 몸을 중히 여기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솔직하다. MZ세대는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신선한 세대이다.
근대 사회,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는 "개인의 자유와 독립"이다.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을 중시하고 계발해 나가는 것, 그것이 경제적 자립과 개인의 행복으로 귀결되게 하는 것이 근대적 인생 경영이다. 개인의 성장을 우선 목표로 정해놓고, 사직서를 품고서 일하고 있는 젊은 세대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사고의 지평이 글로벌로 열려있는 젊은 세대를 보며 대한민국의 낙관적 미래를 점쳐보고 싶다. 규율과 동원에 길들여진 기성세대들은 높은 자리를 젊은 세대에게 내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게 안된다면 정치, 기업, 정부, 각종 조직들에서, 여론과 투표 그리고 실력으로 낡은 기성세대들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래야 길이 열린다. 주눅 든 본성을 화려한 등산복으로 가린 낡은 기성세대들은 이제 2선 후퇴를 준비하자. 낡은 몇 개의 톱니바퀴에 선수들을 몰아넣는 박종환식, 홍명보식 축구보다는, 개인 기량의 성장을 최우선으로 하여 원팀을 만들어가는 스페인 축구가 훨씬 더 선진적이다.
철학이 난해한 용어들로 도배된 고담준론만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하나의 철학 사조가 세상 전부를 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에게 삶의 지혜를 주고, 세상사 가능하면 무탈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기제가 철학일 터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곧 철학하는 것이라 하므로, 허물 많은 글을 너무 타박하지 않아 주셨으면 한다.
정제되고 압축되어 있으면서 가독성이 좋은 글을 좋은 글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장황하게 길어진 글을 내놓게 되었다. 더군다나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과 윤리가 혼재되어 있고, 개인과 개인의 관계, 개인과 사회의 관계도 깊이와 체계가 없이 병렬 연결되어 있다. 인식론도 조금, 실행의 방식도 약간, 세상의 비전도 한 꼬집, 이렇게 중구난방 병립되어 있다. 개똥철학이어서 그렇다. 그래도 병아리 눈물만큼의 위안은 얻고자 한다. 개똥도 약에 쓸 때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