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과 죽음 이후의 피안은, 과연 살아있는 사람이 알아낼 수 있는 영역인가? 어떤 호사가들은 죽어가는 이들에게서 죽기 일주일 전부터 나타나는 몸과 의식의 표면적 변화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과학자들은 죽은 자의 임종 후 몇 분간의 의식 흐름이나 사체의 생리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분야이기는 하나, 구구절절 인생의 경로와 사인이 다른 이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을 성안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종교인들이 내세우는 내세나 천국 또한 경험해 본 사람이 없는 세계인지라 철석같이 믿어주기는 힘들다. 내세나 천국에 대한 믿음이, 자신의 원혼을 절대자에 대한 의존이나 갸륵한 몽상으로 치환하고자 하는 산 사람들의 몸부림에 다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종교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혜안을 가져다주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평온하고도 다소 이지적인 죽음을 준비하는 데에 아직까지는 크게 도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죽음과 피안을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면,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스텐스는 다음과 같을 수 있다. "물질의 극상급 화합물 집합체인 인간의 몸이 그 생체 메커니즘을 멈추면, 의식과 생명 활동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뿐이다. 사체는 생명체라는 유기물로부터 세상의 흔하디 흔한 원소들의 결합체로 이름이 바뀌며, 전지구적 물질대사 사이클에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개인의 정신 건강에는 더 이로워 보인다. 개인이 죽음과 피안을 조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내세와 천국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 전후 몸과 의식의 변화 과정을, 처음 경험하는 아주 특별한 패키지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수 있다. 그냥 몸과 마음을 여행사에게 맡기는 거다. 심 정지든 뇌사든 자연사든 그 딸깍거리는 그 짧은 여정 하나하나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이미 그 순간들은 돌이키기 힘들다. 자신이 탄 청룡열차를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좋아 보인다. 개개인들이 살아온 경로가 각기 다른만큼 그 짧디 짧은 패키지여행의 경로도 제각각일 것이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이미 각각 다른 패키지여행 상품에 가입해 놓은 것과 같다. 주어진 여행 상품의 코스대로 나를 맡기는 것이 개인 심리적인 측면에서 나아 보인다. 그래서 산 사람 입장에서는, 죽음 전후의 순간들이 살아온 인생의 결과물일 수 있으므로 살아가는 날들을 더 알차게 꾸려나가는 편이 현명해 보이긴 하다. 하지만, 이 역시 법칙은 아니다. 선한 자가 험하게 죽기도 하고, 교활한 자가 가상의 성채 안에서 팬덤 가득한 가운데 존경받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사, 세상사,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다.
사람들은 죽음이 뭔지 잘 알지 못하나, 아직 다가오지 않은 죽음에 대한 작은 기대들을 가지고 있다. 비범하지 않은 많은 이들은 많이 아프지 않고 많이 무섭지 않게 죽음의 터널에 진입하기를 바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의 전후 순간들은, 평범한 개인들에게는 회피하고 싶은 시간이다 또한 피할 수 없다면 가능한 한 평온하게 맞이하고 싶어 한다. 누구나 다 평안한 죽음, 담담한 죽음을 원한다. 개나 침팬지 같은 고등 동물들이 임종에 즈음하여 느끼는 감정이 인연과 회상에 있다면, 사람의 경우 인연과 회한이기 쉽다. 죽음에 임박하여 마음속의 평안함이나 지난 삶에 대한 충족감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죽음은 축복이다. "이제 갈 때가 되었네. 아쉬움은 다소 남지만 그래도 잘 살아온 것 같다. 세상에 남는 너희들, 잘 살아라. 나 먼저 간다"라고 되뇌며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장삼이사들의 희망 사항이다. 이는 복에 겨운 일인지도 모른다. 멘털 붕괴에 의한 자살이나 사고에 의한 급사는, 자연사나 병사와는 또 다른 죽음이기 때문이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게임 체인져였던 다카스키 신사쿠는 명징한 사생관을 가졌었다. 대업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스승인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배워 신념화하였다. 사무라이 대장 다운 사생관이다. 법정 스님이나 소설에 보았던 등신불 역시 철저한 금욕적 초월주의자로서 의연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나에게는 뭐라 뾰족하게 내세울만한 사생관이 없다. 아직은 충분히 나이 들지 않았고, 또 과문한 탓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갑남을녀와 다르지 않은 사생관을 가지고 있다. 내세우기에는 좀 부끄러운 사생관이다. 죽음에 대한 나의 평범한 생각은 같은 시공간을 호흡하는 동시대인들의 생각에 공명해온 바 클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당연하게도 대업이나 초월의 경지가 아니라 나의 가족과 지인들의 임종, 그리고 개인적 경험들에 잇닿아 있다.
죽음이 존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2 때의 일이다. 불교신자였던 할머니의 임종은 부산의 당감동 화장터에서 마무리되었다. 어수선했던 그 과정을 복기하고 싶어, 몇 달 후 혼자 그 화장터를 다시 찾았다. 시커멓게 햇볕에 그을리고 주름살 깊게 파인 얼굴로 화장터 마당에서 절구통에 인골을 빻고 있던, 대낮부터 독한 소주에 절어있던 저승사자들을 다시 보았다. 화구로 들어온 시신의 내장이 찢기고 기름이 뿌려져 태워지는 장면도 훔쳐보았다. 어느 저승사자의 도움 덕분이다. 이 견학은 어린 나에게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죽음의 베일을 벗겨보았다는, 어른된 듯한 으쓱함도 있었으나, 사람의 죽음이 허접한 도구들에 의해 지극히 물리적으로 처리된다는 망측함이 컸다. 이때부터 죽음이 무서워졌다.
학교 뒷산 절벽에서 떨어져 저승 갈 뻔했던 기억, 집에서 불 타 죽을 뻔했던 아스라함은 성년 이후의 일이다. 동갑내기 사형수와 사형 집행 전 몇 달 동안 면회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도 20대 때의 일이다. 서른 중반에는 어느 죽은 자와 두 달 동안 만나게 되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해부학 지하 실습실에서였다. 내 또래의 건장한 남성이었다. 사체의 처리를 위해 대퇴 동맥에 꽂은 삽관의 흔적 외에는 외상 하나 없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늦깎이 대학생인 탓에 나이 어린 동급생들로부터 호명받아 그의 복부에 첫 메스를 그었다. 그날 저녁 집에 있던 해부 실습용 인골함 위에 소주잔을 올려놓고서 늦게까지 그를 생각했다. 내가 하얀 스테인리스 수술대 위에 누워있고 그가 날카로운 메스를 나의 죽은 몸에 그었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어떤 경로로 지하 냉장고까지 왔는지, 나는 어떻게 지하 수술대까지 와서 그의 몸에 메스질을 하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고, 상상과 기억은 아련할 뿐이었다. 두 달간의 만남 후 지하실에서의 간단한 추도식을 마지막으로 그와 헤어졌다.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고, 어느 화장터에서 끊기고 잘린 유골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의 사체 역시 당감동 화장터의 죽은 자들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해체되었고, 불에 타서 생명체의 사이클에 종지부를 찍었다. 죽은 자가 산 자들에게 삶의 무기를 나누어주는 몇 안 되는 케이스 중 하나를 그때 경험했다.
코로나 팬데믹의 절정기에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마지막 한 시간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혼자 사시던 댁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홀로 숨을 거두셨다. 숨진 다음 날 발견된 어머니는 법의의 사인 판정 이후에 거실에 누워계셨다. 누님은 주변 정리를 하러 어머니 댁을 나섰고, 나는 어머니와 단둘이서 허허로운 공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눈물도 쏟아질 정도로 나오지는 않았다. "미안합니다"만 속으로 반복해서 읊조릴 뿐이었다. 내가 아기 때 물었던 젖꼭지는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거실을 나와, 어머니가 숨진 현장인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화장실 청소를 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른다. 아마 가신 분의 흔적을 가신 분의 성정대로 깨끗하게 정리해 드리고 싶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영안실 행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다시 한참 동안 어머니와 진공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장례식 이후 근 2년 동안 나는 화장실 갈 때마다 세면대 아래에서 어머니의 인기척을 느꼈다. 내가 어머니께 지은 죄가 많아서일 것이다. 나이 들어 고아가 되었다. 이제 내가 죽을 차례라는 머릿속 인식은 가지고 있는데, 내가 죽을 차례라는 걸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하고 있는 어중이떠중이 중년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서 가족들을 만났고, 좋은 친구들도 만났다. 삶이란 축복이다. 태양계 안에서 태어나 미력하게나마 내 의지대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해 보고 싶었던 것을 어느 정도는 실행해 보았고, 실험해보고 싶은 것들도 어느 정도 시도해 보았다고 자평해 본다. 어떤 일을 기획하고 만들고 온갖 노력을 다해 실행하고,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좌충우돌 우여곡절 살아나가는 과정 자체가 축복이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아 보여 맨날 제자리 뛰기 하는 것 같지만, 10년 20년이 지나고 나서 내면적으로 훨씬 성숙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대단히 부듯한 일이다. 늘 자신의 성장을 도모하며 도전하고 실험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다.
축복 어린 삶의 뒷면에는 슬픔도 있다. 슬픔의 근원은 죽음이다. 사람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 이것은 어찌할 수 없는 굴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십상이어서 준비한다고 준비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개인에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죽기 전이든 죽은 후든 죽음은 삶의 연속선 상에 있다. 개인과 타인, 개인과 세상이 어떻게 관계 맺었냐에 따라 죽음의 수준이 결정된다. 죽음은 자신의 편협한 생각과는 다른 경로를 걷는다.
지하 해부실 냉장고로 옮겨진 30대 중반 남성의 시신은 어린 대학생들의 칼에 난자당했다. 행려자였을 수도 있지만, 아마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을 것 같다. 나보다 월등히 우월한 몸을 가졌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세상에 선물로 주고 떠났다. 숭고한 죽음이다. 어린 여자아이를 유괴 살인했던 20대 후반의 젊은 사형수는 세상에 저주를 퍼부으며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는 사람과 세상을 원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더러운 세상을 향해 악다구니하며 임종을 맞았을 것이다. 고인이 된 두 남성은 사망할 당시 모두 나와 동년배였다. 두 사람 다 대단한 근육질이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러나,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완전히 달랐다.
나에게는 죽은 나를 해부용으로 기증할 용기가 없다. 세상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고 나 자신하고 싶은 것 대충이나마 해봤던 내가 원망과 회한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 같지도 않다. 급작스런 죽음을 맞든 천천히 조여드는 죽음을 맞든 준비된 평온한 심지로 마지막을 맞고 싶다. 이는 생전 어머니의 생각이었고,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나의 사생관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나에게 찾아올 죽음이 급작스런 사고 때문일 수도 있고, 지루하고도 참혹한 요양병원에서의 객사일 수도 있다. 언제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향후 30년 안에 죽을 거라는 것은 거의 확정적일 것이다. 나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길어야 30년일 것인데, 걸어 다니면서 소일이라도 할 수 있는 기간은 20년 남짓일 것이다. 충분히 축복받은 삶이었음에 조금 빨리 또는 다소 나중에 간다 한들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평범한 죽음을 맞고 싶은 나는 평범한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급사나 불가항력의 사고사가 아니라면, 나 역시 여느 사람들과 같이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내 가슴에 "No Code" 문신을 새기든 연명치료 거부 의향서를 작성하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억지로 늘려지는 것은 거부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 죽음의 시기와 형식은 나 자신이 선택하고 싶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죽을 때는 내가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람 구실을 못하고 가족들에게 폐만 끼치는 지경에 처한다면,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나의 자유 의지가 남아있다면, 나는 내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스위스 행일 수도 있고, 이보다 좀 더 참혹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스위스행은 노인정 할머니들의 로망이므로 평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인에게 죽음 선택권을 주는 문제는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가 충돌하는 지점이기도 하여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이기는 하다. 아니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다만 가장 가혹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의식이 내게 남아있지 않은 경우다. 그래서 치매는 나의 적이다.
고 이어령 교수는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들이 너무 궁금하다면서 그걸 음미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경지는 놀라울 따름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다"는 버나드 쇼의 비문 역시 격조 높은 그의 정신세계의 반영이다. 새가슴을 가진 나는 단지 두려움에 떨며 죽고 싶지 않을 뿐이다. 담담하게 떠나고 싶다. 때가 되어 떠나는 것이니 상념은 군더더기일 뿐이겠지만, 나는 아직 담담한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다. 누가 나를 그리 기억해주지 않아도 좋다. 다음 세상은 다음 사람들의 무대이기에 떠나는 사람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저 언덕 너머에 "평온한 죽음, 담담한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소박한 꿈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선진국 한국에서는 죽음에 관한 한 신앙인 여부를 불문하고 무속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유교와 무속이 결합되어 있는 제사를 포함한 상례 문화는 시민들의 일상적 의식 수준과 괴리된 지 오래다. 위계와 기복, 그리고 과시에 기초한 장례와 제사는 간소화될 필요가 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대신 어른들이 돌아가신 양력 날짜에, 그분들이 좋아하셨던 음식을 단품으로 차려놓고 그분들의 생전 사진을 꺼내보며 담소와 함께 간소한 추도식을 연다. 냉면이나 생선회, 갈치조림 등이 차려진다. 때론 소주도 곁들여진다. 기존의 제사를 대체한 추도식 형식은 내가 우리 집안에서는 처음 시도한 것인 만큼, 내가 죽은 후에도 큰 틀에서 유지되었으면 한다. 내가 죽으면 장례식도 간소한 가족장과 화장으로 마무리되고, 나의 유골은 납골당이나 수목장이 아니라 바다에 뿌려졌으면 한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