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즈매니아는 호주의 남쪽에 있는 섬이다. 한국으로 치면 제주도 같은 위치다. 제주도처럼 호주 사람들 사이에서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으로 꼽히기도 한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환경으로 유명해서 섬 곳곳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제주도와는 달리 타즈매니아의 전체 면적은 남한의 3분의 2 정도 되니 꽤나 큰 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구는 고작 50만 명 정도다. 이 섬의 별칭은 사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사과 섬이다. 실제로 사과농장이 많다.
19세기만 해도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의 타즈매니아를 건설한 사람들은 영국에서 건너온 죄수였다. 가끔 한국에서 호주의 인종차별을 다룬 신문 기사의 댓글에 ‘죄수의 후예들이니 별수 없다.’라는 글이 보인다. 나는 인종차별을 하는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넘기게 되지만, 죄수에 대한 부분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끌려오게 된 죄수들은 흉악범이 아니었다. 섬 중심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작은 마을들을 지나가게 된다. 곳곳에 영국 유형지 시절 지어진 풍차, 다리, 교회가 보이는데 어떤 곳은 누가 이 건물을 지었는지 벽돌에 새겨져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리처드 브라운 1820년 손수건 훔침’ 죄수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호주로 보내졌다. 달걀, 빵, 짚더미, 옷가지 등 하찮은 물건을 훔친, 소위 인맥 없고 돈이 없는, 만만해서 끌려오게 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호주에서 거칠게 살아남아야 했다면, 그건 본래 그들이 가진 흉악한 성격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머나먼 고향과 만날 두고 온 가족들이 한없이 그립고 억울했기 때문일 거다. 그러니 그들이 현대 호주인의 잘못으로 인해 모욕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살아서도 회한의 삶을 살았을 텐데, 인종차별이란 명목으로 소환되는 건 너무하다. 여담으로 죄수들은 술로 마음을 달래려고 했는지 호주 최초의 맥주 공장을 이 섬에 건설했다. 놀랍게도 이곳(Cascade Brewery)은 지금까지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타즈매니아의 가장 번화한 도시는 ‘호바트(Hobart)’로 섬 남쪽 끝에 있다. 나는 여기서 멀리 떨어진 북서쪽 바닷가에 있는 ‘버니(Burnie)'라는 외진 곳에 살고 있다. 인구는 2만 명 정도다. 한국에 비하면 정말 작은 동네지만, 서쪽 지역에서 그나마 큰 병원이 여기에 있어서인지 시내엔 맥도널드, KFC, 버거킹, 서브웨이, 도미노 피자가 하나씩 다 있다. 이 소도시엔 몇 블록 안 되는 자그마한 시내가 바닷가 앞 평지에 자리 잡고 있고 뭍으로 올라오면서 언덕이 굽이굽이 자리 잡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이 언덕엔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진의 노래처럼 언덕 능선을 타고 나무 사이사이로 지어진 집들이 바다를 마주 보고 있고, 저녁엔 유리창마다 붉은 노을이 반사되어 바다로 가라앉는 마지막 빛을 붙잡는다.
호주의 대도시에선 여러 인종이 섞여 함께 살아가지만, 시골로 갈수록 백인의 비율이 높아진다. 여기도 마찬가지여서 거주인구의 90% 이상이 백인이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하고 나 말고 다른 한국인이 있는지 수소문을 해봤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끔 이곳 병원으로 간호사 파견을 온다고는 하는데 최근 몇 년간은 그마저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길거리에서 아시아인들은 몇 명 보았지만, 그 사람들을 붙잡고 여기에 사는지 얼마나 살았는지 다짜고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곳 정착에 철저하게 실패했고, 그래서 내년에는 이사를 하려고 한다. 내가 선뜻 여기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 사람들이 너무 배타적인 걸까. 나는 서양문화를 알 만큼 알고 겪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여기만큼 벽에 부딪친 적은 없었다. 내 나이 때가 어중간한 부분도 있기는 하다. 20대엔 학생 신분으로 다양한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30대 후반 동년배의 사람들은 대부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되는 아이를 돌보며 한창 바쁠 시기이고, 50대나 60대 아주머니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일은 더더욱 없으니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인데 억지로 해서 얻어지는 게 무엇이 있을까.
차라리 고립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으로 지금의 시간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훗날 이곳 버니를 생각하면 섬 중의 섬이었고 섬 속의 섬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아득히 멀고 먼 내가 아는 세상에서 멀리 소외된 장소로 말이다. 그리고 이곳에 우두커니 있었던 나도 섬이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