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쇼 코지 가 보여준 헤밍웨이의 빙산이론
헤밍웨이는 말했다. "빙산의 힘은 8분의 7이 물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2023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야쿠쇼 코지. 그가 《퍼펙트 데이즈》에서 보여준 히라야마는 거의 말이 없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며 카시마시 카메라로 나무를 찍고,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다.
2017년 《세 번째 살인》에서 그가 연기한 미스미 다카시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정말 살인을 저질렀는지 끝까지 명확하게 답하지 않는다. 변호사의 질문에 웃음으로, 침묵으로, 모호한 대답으로만 응수한다.
두 영화, 두 캐릭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헤밍웨이가 추구했던 '빙산 이론'의 완벽한 구현이다.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한다. 새벽에 일어나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정해진 화장실들을 순서대로 청소한다. 점심시간에는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카시마시 카메라로 나무 사진을 찍는다. 저녁에는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이자카야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신다. 집에 돌아와서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잠든다. 어느 날 조카 니코가 갑자기 찾아와 하룻밤 머물다 간다. 평온한 일상에 작은 파문이 일지만, 히라야마는 다시 자신만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30년 전 강도살인 전과가 있는 미스미 다카시가 공장 사장을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운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변호사 시게모리는 미스미가 사형을 피할 수 있도록 변론을 준비한다. 하지만 미스미는 자신이 죽였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면서도, 살인 동기에 대해서는 계속 다른 이야기를 한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와 면담을 거듭하며 진실을 파악하려 노력한다. 사건에는 피해자의 딸 사오리가 연루되어 있고,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관계들이 드러난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점점 모호해진다. 미스미는 끝까지 자신만의 버전을 고수하며 법정에 선다. 영화는 진실에 대한 명확한 답 없이 미스미의 표정으로 끝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히라야마. 자판기에서 같은 커피를 사고, 같은 화장실들을 청소한다. 점심은 편의점 도시락.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이자카야에서 맥주 한 잔. 밤에는 책을 읽다가 잠든다. 완벽하게 질서정연한 일상. 아무런 갈등도, 드라마도 없어 보이는 삶.
30년 전 강도살인 전과가 있는 미스미 다카시. 공장 사장을 죽이고 시체를 불태웠다고 자백하며 재판을 받는다. 자신이 죽였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명확해 보이는 사건. 증거도 있고, 자백도 있다. 미스미는 실제로 자신이 죽였다고 계속 주장하면서도, 그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답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의 과거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몇 가지 단서만 남겨둔다. 조카 니코가 찾아왔을 때 보여준 미묘한 표정. 여동생과의 냉랭한 관계. 그가 왜 이런 단순한 삶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침묵. 빔 벤더스 감독은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관객이 상상하게 놔둔다.
만약 히라야마가 과거에 큰 상처를 입었다면?
만약 그가 의도적으로 복잡한 세상에서 도망쳐 이런 단순한 삶을 택했다면?
만약 그 상처가... 어떤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면?
《세 번째 살인》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장 교묘하게 숨긴 것은 미스미의 진짜 의도다.
그는 정말 돈 때문에 사장을 죽였을까?
아니면 사장의 딸 사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였을까?
영화는 끝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미스미의 마지막 표정만 남겨둘 뿐이다.
두 영화에서 야쿠쇼 코지는 거의 설명하지 않는다.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의 대사는 하루에 몇 마디뿐이다. 대부분 "좋은 아침입니다" 같은 인사말이다.
《세 번째 살인》에서 미스미는 변호사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같은 모호한 대답만 반복한다.
하지만 그의 표정, 시선,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한다.
산드라 블록이 《그래비티》에서 딸의 죽음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 않듯이, 야쿠쇼 코지도 자신의 상처를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어떤 순간의 표정, 어떤 순간의 침묵으로만 암시한다. 관객은 그 침묵에서 더 큰 진실을 본다.
요즘 대부분의 콘텐츠는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관객이 조금이라도 헷갈릴까 봐 친절하게 해설을 달아준다.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와 《세 번째 살인》은 정반대다. 설명하지 않는다.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관객을 믿는다. 그 결과?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생각하게 된다.
헤밍웨이의 《하얀 코끼리 언덕》에서 두 남녀가 낙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낙태'라는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야쿠쇼 코지의 두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히라야마가 왜 이런 삶을 사는지 직접 말하지 않는다. 미스미가 진짜 살인자인지도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아니, 느낀다.
영화 마지막, 히라야마가 차 안에서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는 장면. 무엇 때문일까? 과거의 기억 때문일까? 현재의 만족 때문일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야쿠쇼 코지의 표정에 모든 것을 맡긴다.
미스미가 보여주는 마지막 미소.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자신이 누군가를 구했다는 만족감일까?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포기한다는 체념일까? 아니면 마침내 진짜 자신을 찾았다는 해방감일까? 답은 없다. 오직 표정만 있을 뿐이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증명했듯이, 가장 강력한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야쿠쇼 코지가 두 영화에서 보여준 것도 마찬가지다. 설명하지 않는 과거. 명확하지 않은 동기. 모호한 결말. 하지만 바로 그 모호함이 관객을 깊이 끌어들인다.
《컨택트》에서 루이즈 뱅크스가 딸의 미래를 알면서도 그녀를 낳기로 선택하는 이유를 긴 설명으로 풀어내지 않듯이, 이 두 영화도 핵심을 침묵으로 전달한다. 진짜 예술은 빈 공간에서 탄생한다. 진짜 감동은 말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난다.
야쿠쇼 코지가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런 침묵의 힘이다. 빙산의 8분의 7이 물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빙산이 위험한 것처럼, 이 두 캐릭터도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강력하다. 가장 좋은 이야기는 설명하지 않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