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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Aug 21. 2023

다이어리와 다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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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윈주의를 믿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뇌가 진화가 일어날 만큼 긴 '시간 척도'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사건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초, 몇 분, 몇 년, 기껏해야 몇십 년 년 만에 완결되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다윈주의는 사건 진행 속도가 너무나 느려서 완결되려면 몇만 년, 몇백만 년이 걸리는 작은 과정들의 누적에 관한 이론이다.

-리처드 도킨스, [눈먼 시계공], 머리말, 사어언스북스, 2004


나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다(라고 착각하고 산다). 수학적인 머리는 별로지만, 기억해야 할 것들 외에 쓸데없이 많은 것들까지 기억하고 산다. 이유는 나의 기억력에 대한 착각에 숨어 있다. 나는 나의 기억력을 좋게 하기 위해 다이어리를 쓰고 보고, 또 쓰고 본다.


나도 내가 기억력을 타고나지 않았음을 진즉에 알았다. 기억력 좋은 A가 한 번만 쓱 보면 요점정리가 탁 되는 단락 하나를 나는 세 번은 봐야 했으니까. 게다가 세 번을 본 나의 기억력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 기억에 군데군데 오류도 있고, 구멍도 있었다.


기억력 좋지 않은 나의 뇌는 그렇다고 가만있지도, 퇴보하지도 않았다. 살 길을 찾았다. 맞다. 진화했다. 나는 뭐든 적기 시작했다. 세 번 봐도 뇌 속에 숭덩숭덩 저장되는 나의 기억력을 위해 나는 진화했다. 눈과 귀로만 기억하지 않고, 손으로 써서 물질로서 남겼다. 내가 남긴 그 물질을 나는 보고, 다시 또 써보고, 그걸 또 봤다.


그래서, 나의 기억력이 획기적으로 좋아졌을까?

그럴 리가.


진화는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대로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작정 메모로 시작한 나의 다이어리 쓰기는, 그 진행 속도가 너무 느려서 완결되기까지 작고 작은 과정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야 완결될 터이다.


나는, 올해 2023년 6월부터 도입된 전 국민 만 나이에 의해 43세다. 나의 쓰기 진화의 시작은 1995년부터 시작됐다. 역시나 만 나이로 따지자면 15살에 시작한 다이어리 쓰기는 30여 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진화 중이다.


하지만, 다윈주의에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확실한 것은 다이어리 쓰기가 갑자기 누군가의 섭리로 인해서 시작되고 완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다이어리를 어쩌다 우연히 쓰기 시작했고, 누군가 쓰라고 한 사람도 전연 없었다. 그냥 썼다. 쓰다 보니, 썼다.


나는, 다꾸라는, 다이어리 꾸미기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다. 단지 순수하게 '쓰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나의 다이어리엔 오로지 글자만 있다.


글자를 쓰다 보니, 수십 년의 기록이라는 것이 쌓였다. 나의 진화가 나의 다이어리 안에 담겨 있다. 나의 다이어리는 나의 진화의 증거다. 다만, 다이어리를 몇 달, 혹은 몇 년, 더는 몇 십 년의 기록을 썼다고 내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리는 없다. 다윈도 말했듯이 진화는 진행 속도가 너무 느리다.


진화는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다이어리를 쓰면서 나는 나의 기억력이 꽤나 좋다고 착각하며 산다. 내게는 기록이 있으니까. 그리고 세상은 타인의 눈으로 나를 평가하지만 다이어리엔 나의 기억으로 내가 정의한 나의 삶이 있다.


 오늘도 다이어리를 쓰고, 다이어리를 보며 기억력 좋은 기특한 내게 윙크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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