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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Mar 28. 2022

지붕 위의 커피 타임

때로 인생은 커피 한 잔의 문제이기도 하다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커피'를 무기로 내놓는다.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은 격동의 러시아를 살며 호텔 감금이라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30여 년을 시간의 구애 없이 '신사'로서의 삶을 살아온 로스토프 백작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고, 백작은 결국 호텔 지붕에서 자살을 결심한다.  


자살을 몇 년 앞둔 여름밤, 로스토프 백작은 우연히 호텔 지붕에 올랐다가 지붕 수리 일을 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호텔 잡역부의 눈에 띄게 된다. 마침 그 시간은, 호텔 잡역부가 커피 타임을 시작하려던 시간이었다.




"저 커피를 준비할 수 있는데 절 따라오실래요?"


나이 많은 잡역부가 백작을 데리고 지붕의 북동쪽 구석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 있는 두 굴뚝 사이에 나름대로 터전을 만들어두고 있었다. 거기에는 다리가 세 개인 의자가 하나 있었고, 작은 불이 있는 화로도 하나 있었다. 커피 주전자가 화로 위에서 끓고 있었다. 잡역부가 골라잡은 자리는 썩 괜찮았다. 바람을 막을 수 있으면서도 볼쇼이 극장이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 따라드릴까요?"


"고맙습니다."


나이 든 잡역부가 커피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백작은 지금 노인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끝내는 것일까,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커피가 딱 좋은 시점일 거라고 백작은 생각했다. 커피 한 잔 보다 더 많은 쓰임새가 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커피는 새벽녘 부지런한 사람의 기운을 북돋우고, 정오에는 생각에 잠긴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밤중에는 괴로운 사람의 정신을 세울 수 있다.


"커피 맛 정말 좋네요." 백작이 말했다.


노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비결은 원두를 가는 데 있습니다."


그가 L자형 금속 손잡이가 달린 조그만 목재 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끓이기 직전에 가는 거죠."


백작은 커피 문외한으로서 감사의 뜻으로 양 눈썹을 치켰다. 그랬다. 여름밤 옥외에서 마시는 노인의 커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서창렬 옮김, 현대문학, 2018, 203~204쪽




로스토프 백작과 잡역부 아브람의 커피 타임은 커피 맛있게 끓이는 비법에서 시작한다. 그러다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그들 주위를 꿀벌이 윙윙 거린다. 로스토프 백작은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보냈던 니즈니노브고로드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아브람이 미소를 지으며, 응답한다.


"사과꽃이 떨어지는 곳이지요."


니즈니노브고로드에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사과향을 쫓아 날아들던 꿀벌들과 서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길게 나눈다.


이후 로스토프 백작은 이따금씩 지붕으로 올라가서 아브람과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여름밤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지붕 위의 벌들이 벌통에서 사라져 버린다.


1926년 로스토프 백작은 '인간은 결국 철학을 선택해야 한다'며 호텔 지붕 위 난간 가장자리에 오른쪽 발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안녕, 내 조국."


그런데 그 순간 호텔 잡역부 아브람이 다급히 로스토프 백작을 부르며 즉시 가볼 데가 있다며 백작을 데려간다. 로스토프 백작은 망설인다. 지금은 로스토프 백작이 몇 년 간 신사답게 죽기 위해 준비한 완벽한 자살 타이밍이란 말이다. 로스토프 백작은 다급한 아브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살 타임을 잠시 뒤로 미룬다.


"얘들이 돌아왔어요!"


지붕 위 벌통에서 사라진 벌들이 돌아온 것이다. 아브람이 벌통에서 꺼낸 벌집을 잘라 꿀을 스푼에 흘린 다음 백작에게 건넨다.


그 꿀에선 지붕 위 커피 타임의 주요 소재였던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사과향'이 난다.


"얘들은 수년 동안 줄곳 우리가 나누는 얘기를 들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백작은 자살 결심을 접고, 대부가 오래전 해준 조언대로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시간의 구애 없이 살던 신사로서의 삶이 아니라, 시간의 구애를 받지만, 신사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난다고 했던가. 로스토프 백작의 생사는 잡역부와 나눈 지붕 위의 첫 커피 타임에서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은 시작은 커피 한 잔이었다.


때로 인생은 커피 한 잔의 문제이기도 하다.


+

이게 너무 궁금해서 저자 Amor Towles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지붕 위의 커피 타임이, 로스토프 백작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 질문했다. 아래는 저자가 보내온 답장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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