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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물 Jun 29. 2023

비가 오는 날엔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유명한 구절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종종 첫사랑이 생각나곤 한다. 벚꽃이 흩날리는 봄에 사랑에 빠졌고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계절에 외면당했다. 첫눈에 반했고 단번에 외면당한 첫사랑.





처음 마주친 건 학원에서였다. 우연히 지나가면서 마주쳤는데 나는 단번에 반했다. 흔히 말하는 후광이 비친다는 말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큰 키에 태닝 한 듯한 피부, 적당히 마른 몸, 흘깃 쳐다보는 쌍꺼풀이 없는 눈, 나의 외모 취향을 그로 인해 알게 되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아이돌 말고는 좋아하는 감정 자체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불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십 년 가까이 아이돌 '빠수니'의 짬(?)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무슨 과인지, 어느 반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금방 파악했고 주로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흡연여부(?)까지 알게 되었다. 과와 반이 아예 달라 도무지 겹치는 경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같은 과인 친구가 그와 같은 반이었다. 괜스레 쉬는 시간마다 그 반 앞에 가서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흘깃흘깃 훔쳐보는 게 낙이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어김없이 그날도 쉬는 시간에 친구와의 수다를 빙자한 알짱거리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뜬금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내 손에 들려있던 츄파춥스를 다짜고짜 건넸다.



"사.. 사탕 먹을래?!"


몹시 어색한 커다란 목소리는 주변 아이들조차 쳐다보게 만들었다. 



"어?.. 어.. 그래. 고마워"


그는 이상한 눈길로 마지못해 사탕을 받고는 사라졌다.



망했다.

난 이 날 이불 발차기를 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그와 말을 트게 되었다. 아마도 수없이 얼쩡거리는 나의 호감을 눈치챈 듯했다. 마주칠 때마다 인사도 하고 일요일 쉬는 시간에 마주 앉아 사담을 나누기도 했다. 오그라드는 표현이지만 나는 이 열병 같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냥 마냥 좋았다. 걸어 다닐 때는 뒤태까지 신경 쓰곤 했다. 나이에 비해 성숙했던 그는 그런 내 마음을 배려해 주었던 것 같다. 쉬는 시간에 먼저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착각했었다. 우리 사이에 관계에 대한 별도의 언급은 없었지만 나는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성숙했지만 나와 동갑이었던 그는 본인을 좋아해 주는 마음을 거절하기가 미안했고 그래서 나름의 배려를 했을 거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그게 그와 나의 차이였다. 그때부터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수시로 찾아가고 함께 있길 원했다. 그런데 이제 그게 그에게는 점차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7월의 어느 비가 오던 날, 그의 말 한마디는 내 마음을 관통했다.




"우리가 무슨 사인데? 우리가 사귀기라도 했어?"


할 말이 없었다. 따로 사귀자한게 아니었으니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물러났고 그 이후로 그와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다. 함께할 수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대놓고 나를 피했다. 자주 다니던 길, 그와 다니던 친구들 사이에도 더 이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달간의 사랑은 끝이 났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가을 어느 날, 짐을 싸서 퇴소를 하는 뒷모습으로 끝이었다.




두어 달의 짧았던 만남을 나는 쉽사리 잊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술을 마실 수 있게 되면서 취해서 그의 번호로 전화하는 건 고정 술버릇이었다. 일행에게 취하기 시작하면 전화 못하게 하라고 해도 별 수 없었다. 기어코 취하면 으레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차마 통화할 용기는 없어 연결음만 듣고 늘 끊곤 했다. 하루는 연결음을 듣고 다른 날은 여보세요 - 한마디를 듣고 끊곤 했다.




그렇게 전화만 하다가 언젠가는 잊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은 만남이 찾아왔다. 


'무슨 술을 그렇게 밤늦게까지 마시고 돌아다녀.'


모르는 사람에게서 톡이 와있었다. 누구지?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이럴 수가. 통화내역을 보니 그와 통화한 기록이 있다. 무려 2시간이나. 이번에도 술에 취해 기어코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땅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붙잡고 연락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그에게서 먼저 얼굴 한 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한지 십 분째다.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음먹고 화장까지 했건만 오늘따라 화장도 엉망진창인 것 같고 내 모습이 초라하다. 그렇다고 계속 기다리게 할 수도 없어서 마음먹고 문을 연다. 저쪽에서 손을 드는 사람이 있다. 5년 만에 보는 그다.




우리는 그날 마치 처음 만난 소개팅 남녀와 같이 식사를 하고 내가 예매한 뮤지컬을 봤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늦은 저녁 지하철역에서 헤어졌다. 더 멋있어진 모습으로 나타난 그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오히려 스무 살 시절보다 밝고 쾌활한 모습이었다. 헤어지는 순간 그가 아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연락은 계속하자며 뒤돌아섰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인연의 한 구절이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생각이 났다.

떨리던 마음으로 그를 마주하자 오히려 고요히 가라앉았다. 무척이나 애달플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덤덤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때의 너와 내가 아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스무 살 함께했던 우리였다는 것을. 순수했던 그 모습과 마음이 못내 애달팠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고 우리는 어느 정도 때 묻은 성인이 되어있었으며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씁쓸하고 아쉬운 감정이 맴돌았다.





그와는 지금도 서로의 생일을 챙기고 안부를 묻는 정도로 연락한다. 이제는 좋은 친구다. 그 이후로 만난 적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기회는 쉽사리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스무 살 그때의 우리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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