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분노 바이러스, 좀비 아포칼립스, 결혼 스릴러.
이혼 후 그와 물리적으로 분리된 지 28일이 되던 날. 급작스런 병으로 두 번째 반려견을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내준 후라 멍하니 누워 있다가 문득 로드뷰를 켰다. 본가로 오기 전에 강아지와 산책 다니던 길을 따라가 보려고, 너무 그립고 소중한 시간들을 다시 복기하고 싶은 마음에. 근 십여 년 만에 처음 혼자가 된 덕이었을까, 이제 뒤치다꺼리를 할 존재가 없어졌다는 웃픈 여유 때문이었을까. 불현듯 그의 동선들을 거리뷰로 훑기 시작했고,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곳곳의 도박 관련 시설(?)들이었다. 평소엔 전혀 인지를 못했는데, 멀리 떠나온 지금은 눈에 확 들어왔다. 인생이란 이토록 아이러니다.
그간 나는 몇 번이나 도박한 게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니라고 했었다. 도박을 의심했다기보다는 사업의 규모에 비해 큰 빚이 설명되지 않아서였다. 사업 말고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아서, 그게 여자든 도박이든 사기든 있어야 사건의 퍼즐이 맞을 것 같아서. 평소 도박에 대해 좀 알았다면 제대로 의심이라도 해봤을 텐데, 아예 무지했기 때문에 눈치조차 못 챘었다. 또한 평소 힘들어 휘청대는 사람을 앉혀 놓고 취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그는 너무 힘들어했기 때문에 극단적인 행동을 할까 봐 빚의 사용처에 대해 제대로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바로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1336번)이라는 전문기관을 통해 그간의 일들을 상담한 결과, 그는 도박중독이 맞는 것 같았다. 가족이 이렇게 장기간 속는 경우 또한 다반사라고 하셨다. 도박중독자의 가장 큰 특성이 거짓말이기에. 내 촉과 정황, 상담사의 의견이 모두 일치한다. 나에게 끝까지 숨겼으나 그는 도박을 한 것 같다. 반려견을 보낸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더 새롭고 강한 것이 내게 던져졌다.
아… 이러면 이야기가 완전 달라지는데… 나는 정말 당한 게 되는 건데… 그래도 믿었고 믿으려 노력했는데… 사업 빚이 아니라 도박 빚이었다면, 암만 이혼은 했기로서니 그와 나의 관계는 달라진다. 그건 그렇고 대체 그간 나는 얼마나 촘촘히 속은 것인가. 합당한 문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 말고도 극단의 동점심을 유발하며 상대를 가스라이팅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이 편이 여자로서 더 헤어 나오기가 힘들다. 내가 그랬으니까.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진정으로 나를 존중했다면 문제의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도박으로 인해 파생된 문제들만 나에게 던져주는 게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털어놓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나에게 빚을 지우고 내 카드를 쓰고 한 집에 살고 함께 밥을 먹었으면서,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일반적인 심리론 이해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게 결과가 아닌 원인을 말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 아니었겠나.
살면서 화투 한 번 제대로 쳐 본 적이 없던 나인데, 딱밤 말고는 딱히 걸어본 내기도 없던 내게, 팔자에도 없던 도박으로의 세계가 ‘웰컴!’하며 두 팔을 활짝 펼쳐버렸다. 그리하여 이혼 28일 후 나는,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처럼 도박중독에 대해 닥치는 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언젠가는 이 고비를 뛰어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