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중독자의 아내가 될 줄은... 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
결혼 얼마 후 한 후배를 만나 밥을 먹었다. 그는 선하고 바른 느낌의 문학청년이었는데, 밥을 먹다가 돌연 자신의 가정사를 고백했다. 마음을 열어준 것이 고맙기도 했고, 시종일관 덤덤한 표정에 외려 그간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진심으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했었다. 긴 얘기를 종합하자면 아버지가 하우스 도박으로 엄마와 자신을 일평생 힘들게 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런 중에도 중심을 잡고 잘 살아가는 후배가 빛나보였던 그런 날이었다.
요새 그 후배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벌써 10년 간 만나지 못했는데 끊긴 연락을 다시 해보고 싶을 정도로 그 후배가 생각난다. 하지만 오랜만에 연락해 이제야 조금 아물었을지도 모를 후배의 상처를 후벼 팔 수는 없어서 그냥 생각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박이란 멀리 있는,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혼 후 남편의 도박중독을 알게 되었다. 계속 빚을 지는 남편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사업이라는 그럴 싸한 명분 뒤에 숨어있었고, 또 개인회생 합의금 명목 등으로 나를 속여 왔기에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었다. 그 합의금을 못 구해서 나는 근 반년 넘게 발을 동동거렸었다. 간간히 도박을 하는 것 아니냐고 내가 물었지만, 그는 이혼하는 그날까지도 도박은 결코 아니라고 잡아뗐다. 그러나 나의 의혹은 가시질 않았고 그 많은 빚의 출처가 불분명했다. 진실의 조각들이 다 맞아떨어지지가 않는 그런 찝찝함이 계속되었다.
그와 분리되어 비로소 가만히 생각이란 것을 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 그간 그의 동선들을 로드뷰로 계속 따라가 보았다. 답답할 때마다 걷는다던 산책로, 즐겨 찾던 로또방, 낮에 영화를 보러 간다던 피시방, 단골 국밥집, 가출 후 내 카드로 결제한 모텔, 간식거리를 사 오던 시장 근처 등등을 계속 돌려보던 결과 그제야 눈에 보였다. 그 일대 동선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대로와 골목골목에 사설도박장들과 성인피시방이 즐비해있는 것이.
평소 그 거리를 다니긴 했지만 도박을 모르는 내 눈에는 그저 가게들로만 보였는데, 멀리 떨어진 지금 로드뷰를 통해서 보니 바둑이, 포커 등을 하는 도박장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의 진술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간의 그의 행적들이 모두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실종신고 당시에 경찰에게 발견된 장소까지도 바로 그 동네였기 때문에, 이건 뭐... 그가 도박을 하느라 실종되었던 것이 거의 명백해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그가 도박을 한 것이 맞다면 그간의 행적, 거짓말, 빚의 규모 모두 다 납득이 간다. 하지만 나에겐 증거나 자백이 없다. 그가 어떤 종목의 도박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즉시 1336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에 전화를 걸었다. 사연을 모두 설명하며 이 사람이 도박중독일 확률이 있겠느냐 여쭤봤더니 상담사분께서는 도박을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나의 분리에 안심하셨고 상담을 통한 심리치료를 조심스레 권하셨다. 그간의 미스터리한 사건들에 대한 명쾌함도 들었던 한편, 내가 이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되어줘야 하지는 않을까 고민을 하면서 도박중독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진즉에 그가 도박중독임을 알았다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었을까, 하는 시뮬레이션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부한 내용들을 일단 기록으로 남겨보기로 했고,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은 가족들에게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마저 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 후배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리는 것이다.
당시 후배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단 한분, 믿고 의지하던 존재를 잃었으니 그는 얼마나 슬펐겠나. 그 마음은 당시 그가 쓴 글들에 고스란히 묻어났고 이에 크게 공감해 나도 많이 울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도박중독으로 일평생을 시달리다가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자신의 보험금을 남편 모르게 자식 앞으로 다 돌려놓으셨다. 돈이 있으면 도박을 하게 되니까. 그 유산을 받은 후배는 돈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 후배를 보면서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단단한 어른으로 성숙해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때 그의 고백들은 어쩌면 내 인생의 기묘한 복선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인생은 미래의 자신을 돕기 위한 복선을 늘 제공하고, 미래의 나는 언제나처럼 뒤늦게 이를 깨닫는 방식으로 인생이란 놈이 운영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더 소름 끼치는 점은, 내가 그 후배의 고백을 들었던 그날 그 시점에도 어쩌면 전 남편의 도박은 진행 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