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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Oct 26. 2023

2,000원짜리 공깃밥 주세요

천 원이었던 공깃밥에 대하여

  우리는 공깃밥 천 원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은색 스테인리스 그릇에 덜그럭하고 담겨 나온다. 나는 너무나도 뜨거운데 식당 사장님은 내색하나 않고 덥석 덥석 집는다.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공기가 들어있다.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을 꺼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깃밥이 천 원이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공깃밥은 늘 천 원이었고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천 원에 파니까 천 원에 샀을 뿐이다.


  500원에 사 먹었던 길거리 어묵이 1,500원으로 오른 것을 보고 한 동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모든 물가가 올랐다. 사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의 가격이 올랐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치 공깃밥은 오르지 않았다. 식당 메뉴판에서 모든 메뉴에 가격이 덧씌워졌지만 오직 공깃밥만은 1,000이라는 숫자에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속 간증글들이 올라온다. 이제 공깃밥 천 원 시대는 깨졌다고. 1,500에서 2,000원까지, 내 기억만큼이나 오래된 공깃밥의 전통이 깨지고 있다는 소리다. 이미 미칠듯한 물가상승률에 놀랄 만큼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놀랄 것이 남은 모양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공깃밥도 오르리라 것을. 하지만 진짜로 오른다면 정말로 시대가 변했음을 체감할 것 같다. 



  우리가 공깃밥을 먹는 이유


  나도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왜 우리는 공깃밥을 먹고 있을까? 그것은 국가가 정했기 때문이었다. 쌀 생산량 대비 소비량이 더 많았던 70~80년대에 소비량을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수북이 밥을 쌓아놓고 먹던 식습관을 개선하기 위해 그릇의 규격을 정했던 것이다. 


  당시 이것을 어길 경우 영업정치 처분까지 당할 수 있었으니 정부는 쌀 소비량 줄이기에 상당히 진심이었단 소리다. 덕분에 식당에서 파는 밥은 모두 우리가 아는 공기 속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기어이 생산량이 소비량을 따라잡면서 이 제도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나도 식당에서는 공깃밥을 주문한다. 


  아마 법으로 정해졌던 터라, 그리고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모두가 엄격하게 지켰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빠르게 일상으로 자리를 잡았고 익숙해졌을 것이다. 제도가 폐지되었더라도 굳이 바꿀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다. 보관도 용이하고, 보온성도 뛰어나며 밥을 많이 담아주지 않아도 되는 스테인리스 공기에서 바꿀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한국 외식업의 전통과 역사로 남은 것은 아닐까. 크기는 변했어도 우린 여전히 번쩍이는 스텐 그릇에 밥을 먹는다.   



  (공깃)밥만 잘 먹더라


  '밥'이라는 단어는 쌀로 지은 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 끼 식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뜨끈한 밥은 식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식사와 쌀밥 한 그릇을 동일하게 보는 것이다. 쌀 소비량이 줄고 밥 이외의 다양한 주식이 등장했지만 밥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주식임에는 변함이 없다. 단순히 곡물이라 치부하기에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천 원 남짓한 가격에 화려하지 않은 맛, 투박한 담음새는 공깃밥을 식탁 위의 조연쯤으로 생각되게 하지만 한상차림에서 시작점과 마침표는 밥이다. 완전 자율화에 성공한 몇 안 되는 식량이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비교적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된 영양분 섭취원이다. 외식과 내식을 가리지 않고 항상 한식의 출발은 밥에서 한다. 한국인들이 밥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데는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고 공깃밥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밥상의 기본이 되는 만큼 없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기준점이 된다. 오랜 시간 동안 1,000원이라는 가격표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인되었고 사실상 하나의 정의로 남았다. 한국 외식 시장에서 그 어떤 음식도, 제품도 이 정도로 고정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평균을 넘어 사실상 정찰제 수준의 공깃밥 가격은 이제 올리지도 못하는 눈물겨운 상황을 연출해 낸다. 우리가 가격을 당연히 여기면서 밥만 잘 먹기 때문에.    



  1,000원이라는 덫


  모든 것이 올랐다. 길거리 어묵도, 한 잔의 커피도, 불판 위의 삼겹살도 전부 올랐다. 정말 오르지 않은 것은 공깃밥뿐이다. 물론 '쌀'은 외식업계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특별히 관리하는 곡물이기 때문에 가격변동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렇지만 가격 상승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가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에 결국 어느 정도 흐름에 몸을 맡기고야 만다. 


  그러나 쌀값은 변했음에도 공깃밥의 가격은 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올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기준처럼 남아버린 탓에 가격 인상을 시도하면 소비자들에게 거부감을 사버린다. 당장 식당에서 공깃밥을 1,500원에 판다 고하면 다들 흠칫하며 놀란다. 너무 오랫동안 굳어버린 판매가 덕분에 가격이라는 개념보다는 '정의'처럼 남았다. 내 기억 속에서마저도 공깃밥은 늘 1,000원이었으니까. 지금의 소비주체로 떠오르는 20~30대에게 모두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1,000이라는 숫자는 너무 깨끗하고 깔끔하다. 푸른 지폐 한 장으로 지불 가능한 1,000원은 가격을 덧붙이거나 곱을 하기에 너무나 완전무결해 보인다. 그 어떤 마케팅도, 눈속임도 통하지 않는다. 1,000이라는 숫자에 오랫동안 눈을 고정한 덕분에 1,000이 아닌 것을 자연스럽게 배척하게 되었다. 이것저것 지저분하게 붙이지 말고 그냥 천 원이면 되잖아? 식의 마음가짐이 우리도 모르게 자연스레 뿌리내렸다.   



  이제 그냥 놓아주면 돼


  내가 말한 이것들을 자영업자들이 모를 리 없다. 다들 피부로 체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올리지 않았던 것이라기보다는 올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진율이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감당이 되지 않으면 결국은 올려야 한다. 말했다시피 임대료가 비싼 몇몇 동네에서는 이미 공깃밥 가격이 올랐다. 이제 시작이다. 


  스무 살 시절, 압구정에 사는 친구에게 강남은 소주 한 병에 6,000원 받는다는 것을 듣고 기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6,000원이라는 가격표가 그리 놀랍지는 않다. 공깃밥도 머지않았다. 어쩌면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공깃밥 천 원은 이제 고릿적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변화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찾아온다. 


  쌀의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런 물가상승률에 지금까지 천 원을 유지해 온 것도 놀랍다.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되었다. 공깃밥 천 원을 고수하는 식당은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런 식당은 신념이 뚜렷하고 착하다면 착한 식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깃밥을 천 원에 팔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식당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서서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그냥 놓아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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