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여분 남짓 걸려 도착한 도쿄 외곽 지역 병원응급실은 무척이나 한가했다. 간호사 한 명만 보인다. 선배가 나를 부축하고 둘은 응급실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이미 난 멀쩡하다 어제 대학병원에서도 그랬는데 이상하게 병원에만 도착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꾀병인가?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걸까? 누구나 모두 겪는 일인데 나만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드는 어제와 오늘이다.
지금은 몸상태가 매우 괜찮은 상황인지라 간호사에게 어제오늘의 증상을 비교적 침착하게 설명했고 아울러 어제 대학병원 응급실에 다녀왔던 사실도 이야기했다. 내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하던 간호사도 불과 24시간 이내에 다른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얘기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는 느낌이 든다. 설명을 다 듣고 간호사는 의사를 호출하러 간다. 명색이 응급실인데 의사의 소견은 듣고 가는 게 좋겠다. 한참을 기다렸다. 멀리서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걸어온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방금 자다가 깬 모습에 바지 안쪽으로 손을 넣고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면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다. 안보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우리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까지 바지 안쪽에 넣은 손을 빼지 않는다. 응급환자가 없는 새벽이니 충분히 쪽잠을 잘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환자 앞에서 바지 안쪽에 손을 넣고 면담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내 모습을 힐끗 보던 의사는 지금의 상태가 응급실 까지는 오지 않아도 될 정도라는 뉘앙스로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과호흡이에요. 과호흡”이라고 말하며 나중에도 힘들면 숨 쉴 때 비닐봉지에 입과 코를 대고 숨을 쉬면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돌아갔다. 아마도 자러 가는 것 같다. 아무렴 어떠랴. 지금 당장은 살 것 같은데.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제오늘 처음으로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분명 좋아졌다는 뜻일 것이다. 족히 18시간 정도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는데 지금까지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서둘러 수납을 했다. 특별히 처치를 받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7천엔 남짓 결제를 한 것 같다. 솔직히 이것도 조금 비싸다고 생각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호텔 주변의 규동 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아침 6시가 됐다. 방에 들어가면 또 혼자라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선배도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어제오늘 일은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일이었다.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 기분, 앞으로도 평생 그 쓰러질 때의 공포와 세상과 분리되는 기이한 느낌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어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요요기 역 앞에서 쓰러지려고 했던 순간에 어떻게든 버텼다면 달라졌을까? 방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지만 여러 생각으로 역시나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느덧 9시가 다 되었다. 지금 이상태로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기는 무리다.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해보니 고3 이후 줄곧 피워왔던 담배도 한 번도 피우지 않았다. 아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이 기분이라면 바로 금연도 가능하겠다. 아무튼 지금 당장 마음의 여유가 좀 생겼다고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서둘러 오늘 약속된 일정 두 개를 모두 취소했다. 여담이지만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 중 한 명은 내가 직접 약속을 취소하는 전화를 하자 내가 빠칭코를 하려고 약속을 취소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고 한다. 기분은 나빴지만 어느 정도 수긍은 된다. 지금껏 수많은 일본 출장 시에 일정을 마치고 손님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어김없이 빠칭코가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는 이 요물 같은 기계 앞에서 많은 시간과 돈을 바쳤기 때문이다. 잃기도 많이 하고 또 따기도 많이 했다. 원래 카지노의 슬롯머신 종류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그 정도로 좋아하는 게임이지만 오늘은 빠칭코 그 특유의 냄새조차도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
서둘러 오늘 저녁 비행기로 바꿔야겠다. 원래 모레 귀국 일정인데 오늘 저녁으로 당장 바꾸고 싶다. 그러려면 오전에 바꿔야 유리하다. 하지만 같은 하네다-김포 일정은 매진이다. 다음 날 오전에는 가능하다고 했지만 쓰러졌던 이 곳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방법을 알아보니 바로 오늘 저녁에 나리타-인천 일정이 남은 게 있어 멀지만 인천행으로 바꿔 귀국하기로 했다.
비행기 시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창문이 열리지 않는 이 좁은 방에서 계속 있기가 고역이다. 그렇다고 공항에 너무 일찍 가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공항까지 가는 방법도 문제다. 보통이라면 리무진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걸려 갈아탈 걱정 없이 푹 자면서 이동하면 되겠지만 어제오늘의 사건을 겪으면서 어딘가에 갇혀 이동한다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솔직히 누가 같이 공항까지 이동해줬으면 한다. 이런 걱정을 하다 보니 '그 좁은 비행기에 타고 두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엄습한다. 그렇다 공항까지야 어떻게든 가겠지만 문제는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이다.
우선은 짐을 모두 싸서 호텔 로비로 나갔다. 아직 시간은 많지만 좁은 방에 혼자 있기가 너무 두려웠다. 적어도 로비에 앉아 있으면 직원들 눈에 띄니 그나마 안심이다. 로비로 내려가 체크아웃을 한다. 직원들 중 한 명은 어제 새벽에 구급차를 불러준 직원인 것 같다. 나를 알아보고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다. 대략 상황 설명을 하고 예정보다 이틀이나 더 빨리 체크아웃을 하는 나에게 일본 특유의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표정을 짓는다. 익숙하지만 고마운 표정이다. 로비에 반쯤 누워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낸다. 30분쯤 그러고 있었다. 비즈니스맨들이 주로 묵는 호텔의 대낮은 사람들이 없었다. 푹신한 소파에 반쯤 누워 있는 자세를 하고 있으니 심장 박동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자세를 바르게 고쳐본다. 그리고 다시 반쯤 눕는다. 한 번 느껴진 심장 박동은 더욱 예민하게 느껴진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다. 차라리 이르지만 공항으로 이동해야겠다. 걷다 보면 최소한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이 느껴지지는 않겠지..
공항까지의 이동은 버스를 포기하고 결국 전철로 이동한다. 버스의 노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대로 버스를 탔다가 혹여나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온다면 당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철이라면 최소한 내리고 싶을 때 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아니면 여기저기 이동하며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근처 닛뽀리 역에는 스카이라이너라는 우리로 치면 공항철도 같은 교통수단이 있어 생각보다는 큰 무리 없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차 안에서 마음이 안정되자 다시 한번 어제와 오늘의 일을 곱씹어 본다. '무엇이 문제인가? 충분히 예방이 가능하지는 않았을까?' 대부분 스스로를 질타하는 내용이다. 젊은 몸을 믿고 술, 담배를 가까이해서 그런가 라는 생각도 해본다.무엇인지는 몰라도 심장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자꾸 든다. 살면서 회사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 이외에는 제대로 병원도 가본 적 없는 내가 한국에 들어가면 우선 병원을 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한다. 세 시간이나 남았지만 웬일인지 체크인을 해준다. 다행이다. 보통은 짐을 부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내려서 짐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바로 집으로 가고 싶다. 비행기를 자주 탔던지라 항공사에서 제공하는 특정 등급이 되어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다. 세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라운지에서 기다릴 수 있으니 매우 다행이다. 수십수백 번 해왔던 별것 아닌 출국 수속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전철 타는 것, 공항에 도착하여 체크인하는 것, 출국을 위해 줄을 서는 것 등등 하나하나가 새롭고 두렵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운지에 들어오니 마치 게임의 끝판왕을 마주하기 바로 전 단계까지 도달한 느낌이다. 비행기기에 탑승하는 순간 그 끝판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아침 6시 즈음에 밥을 먹고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마찬가지 담배도 하나 피우지 않았다. 배가 고파왔다. 라운지에 준비된 음식을 조금 먹는다. 여기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로 널찍하게 떨어져 앉아 있어서 그런지 왠지 마음이 놓인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상황에서는 맘이 편해지는데 좁은 곳에 많은 사람이 부대끼며 밀집되어 있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어지럽고 메스껍다.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드디어 끝판왕을 마주하러 비행기에 탑승한다. 다행히 체크인을 할 때 이미 복도로 지정을 해놨다. 어제오늘 경험한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 오면 언제든지 복도로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이륙과 착륙을 위해 좌석에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경우에는 불가능 하지만 최대한 생각한 방법이다. 고작 두 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는데 이런 것 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하는 내 처지가 처량하다.
사람들이 서서히 들어온다. 주변이 사람들로 채워져 갈수록 염려했던 답답함이 느껴진다. 결국은 만석이다. 만석의 비행기 내부는 오늘따라 와이셔츠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여기에 넥타이까지 정석으로 착용한 느낌이다. 답답하다. 승무원에게 ‘나 별로 몸이 좋지 않아요.’라는 눈빛으로 물을 요구했다. 지금껏 비행기를 타고 출발 전에 승무원에게 물을 요구한 것은 처음이다. 이륙 전 가장 바쁜 승무원들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승객들을 평소 달갑게 보지 않았다. 어차피 이륙하면 물이든 식사든 챙겨 줄텐데 고작 몇 분을 못 참을까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내가 물을 요구하다니.. '다른 사람들도 더러는 나와 같이 말 못 할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만석의 비행기에 사람들에 둘러싸여 몸을 직각으로 세우고 있자니 별안간 불안해진다. 아까는 답답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어제 경험한 그 불쾌하고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어제처럼 완벽하게 오지는 않았지만 심장의 박동이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분명 구급차를 찾게 될지 모른다. 처음이다. 비행기가 출발을 위해 기다리고 모두 안전벨트를 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풀고 화장실로 향했다. 당연히 승무원들이 앉아 달라고 제지를 했다. 승무원에게 내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의 일 그리고 지금의 내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엔 자리에 앉으라는 승무원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묻힐 것 같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토할 것 같아요."라고 하자 급히 화장실로 안내해준다. 토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저 자리를 지금 당장은 박차고 일어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일어나서 움직이니 좀 나아졌다. 화장실에서는 큰 숨을 여러 번 들이키고 세수를 하고 나왔다.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자 아까보다는 훨씬 숨쉬기가 수월하다.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도대체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은 비행기에서 아주 꿀잠을 자는 편이지만 오늘은 잠이 오지 않는다. 당연할 것이다. 머릿속에 온통 태어나 처음 겪은 일에 대해 복기를 하느라 잠이 오지 않는다. 두 시간 남짓의 비행시간이 길게 느껴지려는 순간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다행이다 잠시나마 잠이 든 것이다.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당분간은 비행기 탈 일은 만들지 않기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