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륙하자마자 휴대폰을 켜니 같은 부서의 후배가 인천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가 보인다. 오전에 일본에 있을 때 회사에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비행기를 오늘 저녁으로 변경하자 때마침 근처에 있었던 같은 부서 후배가 내용을 듣고 걱정이 됐는지 공항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후배는 나보다 세 살 어리지만 이미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아빠다. 첫째는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결혼이 빨랐다. 아무튼 고마웠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후배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제오늘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나이 먹은 노총각이 원인 모를 이유로 타국에서 응급실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내용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결혼하셔야죠.”라고 말을 건넨다. ‘결혼을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집에 도착하자 늦은 시간이지만 후배가 잠깐 들어왔다가 간다고 한다. 걱정이 꽤 됐던 모양이다. 싫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들어간다고 해도 바로 잠에 들지는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혼자 있는 것보다는 둘이 낫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둘이 차 한 잔을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집에서 전화가 온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로 딸이 언제 오냐고 묻는다. 아빠가 어린 딸과 대화하는 특유의 화법이 오늘따라 부럽게 느껴진다. 후배는 곧 집으로 돌아갔다. 배웅을 하고 돌아오니 다시 나 혼자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 집 아니 내가 사는 이 원룸형 오피스텔은 아주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성격상 집이 지저분하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다. 집에서 음식을 해먹을 때도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는 음식은 해 먹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10년 넘게 혼자 살았지만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주는 업체를 이용하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이 집이 달갑지 않다. 난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좀 전에 후배가 말했던 ‘결혼하셔야죠.’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오늘처럼 혼자인 이 순간이 싫었던 적은 없다.
사실 나는 한 달 전 결혼을 주선하는 업체에 유료로 가입을 했던지라 이미 두 차례 업체에서 주선하는 만남을 가졌다. 점차 나이가 들고 생활하는 패턴이 한정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만나 결혼할 수 있는 기회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선배의 권유로 업체에 가입을 했던 것이다. 두 번의 만남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세 번째 만남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소개를 받게 될 상대방에게 어제오늘의 경험을 이야기하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겠지?’ 잠을 청하려 자리에 누웠다. 보통은 복층에 있는 침대에서 잤지만 오늘은 아래층의 소파에서 자야겠다. 복층의 천장은 너무 낮아 답답할 것이다. 밖에서 아무리 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도 기어이 계단을 기어올라 복층 침대에서 잤던 내가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 계산을 하고 있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오늘은 TV를 켜고 자야겠다.
다음 날이다. 어제는 생각보다 큰 문제없이 잠을 잘 잤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다가 오래간만에 푹 잤는지 오히려 몸이 더 가뿐하다. 지난 응급실행이 거짓말 같이 느껴진다. ‘역시나 별 것 아닌데 내가 민감하게 반응해서 그런가?’,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다시 좋아졌나?’ 하며 여러 생각을 해본다. 오늘 병원에 가보려고 했으나 갈 마음이 사라졌다. 차라리 운동을 해야겠다. 어차피 오늘, 내일은 휴가를 냈고 토요일, 일요일까지 하면 4일이나 쉴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운동을 시작해야겠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걷기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꾸준히 오래 걸어본 적이 없던 터라 충분한 운동이 될 것이다. 지난 응급실행은 잊고 무작정 걷기를 시작했다. 평소 차로만 다녔던 길을 걷는 것이다. 12시 즈음 집을 나서 집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오기로 했다. 집 근처에는 차로 약 10분 거리에 대학병원이 있다. 혹시 모르니 가급적 병원을 끼고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 집에 돌아오니 약 두 시간가량 걸었다. 상쾌했다. 기분이 좋았다. 원래의 나를 찾은 느낌이다. 다음 날에도 같은 코스를 걸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구석구석을 돌며 걸었다. 집에 돌아오니 두 시간 반이 걸렸다. 이 정도 컨디션이면 내일 시술받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내일은 모발이식 시술이 있는 날이다. 이미 몇 주전에 예약을 했다. 실은 오래전부터 M자형 탈모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앞머리의 M자형으로 인해 꽤나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더 넓어지는 것을 느끼다가 큰 맘먹고 시술을 예약한 것이다. 정말 크게 마음을 먹었던 시술이라 꼭 하고 싶었다. 이번 응급실행을 겪고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간절한 시술이었다.
드디어 시술을 하러 가는 날이다. 강남에 있는 병원에 가서 프로포폴을 주사받고 자고 일어나면 끝이다. 푹 자는 사이에 시술은 이뤄질 것이고 잠에서 깬 나는 주의사항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주의사항을 지키면 된다. 매우 간단하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일을 오늘 실행하러 간다.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서울로 향하기 시작한다.
10분 정도 운전을 했을까? 아직 분당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 아무런 전조 증상도 없이 일본에서의 그 증상이 왔다. 운전을 하고 있고 지하차도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그 시점에 오는 그 증상은 형용할 수 없었다. 핸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조작되지 않는다. 지하차도 기둥에 부딪힐 것 같다. 브레이크를 밟고 싶은데 지금 밟으면 뒤차가 내차를 추돌할 것이다.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른쪽으로 기운다. 이 순간을 모면하고자 앞뒤 창문을 모두 열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라며 크게 외치지만 한 번 온 그 증상은 끝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딘가 부딪혀 차를 세워야 이 증상이 끝날 것 같은 느낌이다. 핸들을 확 꺾어 차가 뒤집히면서 내가 의식을 잃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당장은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몇 백 미터만 가면 지하차도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럼 차를 세울 수 있다. 평소 같으면 20초 정도면 되겠지만 지금은 1초도 견디기 힘들다. 아니 못할 것 같다.
속도계는 시속 30km 정도를 가리킨다. 뒤차가 경적을 크게 울리지만 희미하게 들린다. 창문을 모두 열고 ‘나 힘들어요.’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알아서 추월하여 나를 좀 보고 가라고 말하고 싶다. 겨우 지하차도를 나와 대로변에 차를 정차하고 차 안에서 다시 크게 소리를 지른다. 손과 발이 저리고 아주 차갑다.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이건 분명히 뇌졸중의 전조 증상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공포가 극에 달한다. 이미 나의 머릿속엔 뒤집어진 차와 의식이 없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며 패닉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 고민한다. 이런 상태가 10분 즈음 지속됐다. 10초도 견디기 힘든데 10분이나 걸렸다. 약간은 안정이 됐지만 뇌가 무거워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렵다. 마치 어렸을 적 코끼리 코를 하고 10바퀴 돈 다음에 섰을 때의 느낌이다. 다시 운전을 해서 시술을 받으러 가는 것은 무리다. 시술을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지금 나에게 머리카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학병원으로 가야겠다.
자동차 전용차로를 겨우 빠져나와 차를 적당히 주차하고 택시를 호출했다. 근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혼자 가다가 생각한다. ‘다시 조금 전과 같은 증상이 오면 어쩌지?’, ‘병원에 가려면 보호자가 필요하지 않을까?’ 여러 생각 끝에 작은 어머님께 전화했다. 병원 근처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평소 일 년에 명절 때 두 번 정도 뵙는 부탁을 드리기 조금은 쉽지 않은 관계지만 지금은 당장 병원에 동행해 줄 보호자가 간절하다. 하지만 오늘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안부전화를 한 것이라고 둘러대고 전화를 끊고 혼자 병원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