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시드니에서 수족관과 동물원, 전시관이 한데 모여있는 관광 어트랙션, Merlin Entertainment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곳은 이른바 저세상 조직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을.
Merlin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이면 Star-a-wards라는 이름으로 행사가 열린다. 이 곳의 전 스태프를 Star라 칭하고, 이 행사에서는 전 직원이 다 같이 모여서(원하는 사람만 가면 된다. 특별히 참/불참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맥주랑 핫도그를 먹으며 그 분기에 좋은 성과를 거둔 사람에게 상을 준다. 이 시상식이 끝나면 각자 삼삼오오 모여서 논다.
여기서 ‘논다’는 이 단어가 꽤 어색할 수 있는 데, 정말 말 그대로 논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star awards(이하 스타워즈)를 처음 방문했을 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좋은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원래는 코알라들이 있는 공간을 그날 저녁에만 스타워즈를 위한 공간으로 바꿨는데 바닥에는 거대 체스판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나무에 안긴 코알라들이 잠을 자고, 오른쪽에는 또 다른 게임 도구가 있다. 다들 맥주와 핫도그를 들고서는, 늘어지게 자고 있는 코알라들과 사진을 찍거나 체스를 두거나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스태프들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는 우리 동물원의 마스코트, 코알라 친구 pic by 박앤비
처음 간 스타워즈에서 나와 동기는 맥주랑 핫도그만 든 채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누가 봐도 신입 티를 팍팍 내는 우리를 본 매니저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다. 모두가 낯선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며 친해지려 하는 상사들을 보며 내가 지금 어떤 곳에서 일하고 있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조직문화이론 수업을 들어보지도, 관련해서 한국에서 회사 경험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이 곳에서는 굳이 팀빌딩이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름이 필요 없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들과 놀면 그만이다.
첫 스타워즈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세 달 뒤 두 번째 스타워즈에도 방문한다. 이번에는 밀랍인형 전시관을 파티 장소로 꾸몄는데, 할리우드의 셀러브리티 밀랍 인형들이 있는 이 곳이 클럽으로 변신한다. 먼저 그 간의 노고를 치하하며 우수한 성적을 거둔 직원들에게 상을 주고, 곧이어 원하는 사람들이 나와 장기자랑을 하며 분위기를 달군다. 장기자랑에는 노래 부른 사람 3명, 시인 1명, 스탠드업 코미디언 1명이 무대에 올랐는데, 드랙퀸과 함께 하는 무대에서는 뜬금없는 시 낭송도 즐겁다. 모르는 영어를 알아듣는 척하는데 도가 튼 나는, 남들보다 0.01초 늦게 웃고 환호한다.
두 번째 스타워즈의 장기자랑 무대 pic by 박앤비
두 번째 스타워즈의 대미는 DJ만이 무대에 섰을 때다. 장기자랑의 종료와 동시에 귀에 익은 팝송과 잘 모르는 하우스 음악이 번갈아 나온다. 스타워즈가 시작한 지 2시간쯤 지나 얼추 알딸딸해진 직원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한다. 으레 친구들과 클럽이나 어디 펍에 가면 그렇듯,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원형으로 모여 음악에 취해 리듬을 탄다. 그런데 그 리듬을 우리나라로 치면 부장급 되는 매니저와, 엄마 또래인 옆 팀의 슈퍼바이저와 함께 탄다. 조금이라도 익숙한 얼굴이 보이면 그쪽 무리로 슬그머니 들어가 건배와 함께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춤을 추고, 그게 유행이든 지났든 재밌으면 그만이다.
회사 직원들과 논 다는 게 가능하다는 것, 일개 6개월짜리 불안정한 캐주얼 직의 내가 수족관 전체를 담당하고 있는 중간 관리자급의 매니저와 부담 없이 대화 나누고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비단 자유로운 워크숍 분위기의 스타워즈 때문 만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는 여러 번 내 머리를 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스타워즈의 존재 이유인 좋은 성과를 낸 직원들은, 상급 관리자들의 인사 고과 평가가 아니라 전 직원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칭찬에 의해 구별된다. 전 직원들이 서로가 감명받은 스태프에게 칭찬카드를 써 보내면 그 달의 우수 사례를 뽑아 사례한다. 근태와 실적을 논하는 게 아닌, 본인의 포지션에 따라 어떠한 서비스를 제공했고 그 과정에서 충분히 인상 깊은 지점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칭찬카드를 써서 보내고 받을 수 있다. 일개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이자 캐주얼 스태프인 나 조차도 칭찬카드를 자유롭게 쓰고 받을 수 있다.
이곳은 어쩌면 한국 회사들이 그토록 원하는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가진 직장일지도 모르겠다. 수평문화를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직급 대신 영어 이름을 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약간의 반말과 존댓말을 사용해 누가 윗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몇몇 회사들이 바라는, 그런 직장.
그리고 그 초수평적이고 초자유적인 직장 안엔,
한국에서 잘하기 위해선 남들보다 돋보여야 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습관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한 내가 있다.
* 이번 편은 호주에서 경험한 직장생활과 조직문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 편에는 스타워즈 말고도 Merlin에서 이렇게 자유롭고 수평적인 문화가 어떻게 유지가 가능한 지, 지난 약 4개월간 관찰하고 교훈을 얻은 바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앤비 : 현재 호주 워홀 중으로 경험한 일이나, 이 곳 사람들은 어디서 놀고 뭐 먹고 지내는지에 관한 글을 씁니다. 마음은 여행 잡지 에디터지만, 막상 글을 완성해보면 '이런 일이 있었쪄요 우엥엥'하는 극 초보 레벨 1짜리 블로거에 가깝습니다. 매주 한편 올릴 예정이며, 앞으로 더 나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