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행복을 씁시다. Do HAPPITS-6

손해 볼수록 행복해지는 마법

by 행복실천가 오원식

손해(損害): 損 덜 손, 害 해할 해

1. 명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밑짐.

2. 명사) 해를 입음.

<표준국어대사전>


손해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손해를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밑진 상태를 의미하며 밑지는 일이 반복되면 생존에 불리해지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길이라 봐도 틀림이 없다. 그런데 손해 볼수록 행복해지는 길이 두 가지나 있다면 궁금하지 않은가?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기에 내 삶을 힘들게 만드는 손해 볼수록 행복해지는 길을 소개하겠다.

첫 번째 손해는 ‘결혼’이다. 나는 기꺼이 손해를 보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다. 나보다 더 큰 손해를 보는 것은 나와 함께 사는 천사님이다. 오죽하면 내가 천사님이라 부를까? 천사님은 언제나 자신 있게 나에게 손해 보고 사는 사람이라 웃으며 말한다. 매우 인정한다. 내가 태어나서 본 제일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할 정도로 나를 위해 손해를 보는 사람이니까. 물론 나 역시 열심히 손해를 본다. 우리는 서로 손해를 거듭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보는 손해가 고스란히 상대방의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랜 시절이 지나면 50년 넘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계신 부모님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라 기대한다. 언제나 오늘이 제일 이쁘다고 진심으로 말씀해 주시는 아빠와 아빠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챙기시며 매일 칭찬해 주시는 엄마를 보면 결혼생활의 손해는 어쩌면 인생 최대의 행복재테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천국과 지옥의 식사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오래 생각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국과 지옥의 식사시간을 구경할 기회가 생겼다. 우선 지옥에 가니 엄청나게 화려한 음식에 둘러 쌓여 자기 키보다 큰 수저와 포크로 음식을 먹으려고 애는 쓰지만 워낙에 긴 탓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배가 고프니 서로 싸우느라 아우성이었다. 이게 지옥의 벌인가 보다 하고 더 화려한 음식과 적당한 크기의 수저와 포크가 있는 천국의 식탁을 기대했는데 지옥의 식탁과 똑같은 음식에 똑같은 수저와 포크가 있기에 무엇이 다른가 했는데 천국에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서로 먹여주고 있던 것이었다. 손해는 양보라 생각하기만 했던 내게 손해는 이익이라는 깨달음을 처음 준 기억이다. 우리의 결혼도 그렇지 않을까? 서로 기꺼이 손해 보는 결혼은 천국의 식사시간이요. 내가 손해 볼까 걱정하는 결혼은 지옥의 식사시간인 것이다.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의 결실이 결혼이다. 결혼할 때는 항상 ‘나보다 내 배우자를 더 아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하지만 정작 결혼 후에 그 믿음이 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연유일까? 내가 만나본 미혼남녀들이 결혼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손해 보는 결혼’이 싫기 때문이다. 혼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면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두려움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그래서 매우 자신 있게 손해 보는 행복을 알리고자 내 경험을 토대로 <결혼은 손해 보려고 하는 일이다>라는 강의를 만들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열 쌍의 짝을 탄생시켰다. 그 덕에 주변에서도 자꾸 요청을 하는데 이제는 그 수준을 넘어 입소문으로 연락을 받게 되어 결혼 정보회사의 커플 카운슬러로 일도 할 정도다. 그러다 보니 결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듣게 되는데 결혼을 언젠가는 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이 아닌 영원한 ‘내편’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베프인 강태혁 씨의 명언이 있다. “살아보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친구는 내 배우자더라.” 매우 공감한다. 세상에 단 한 명의 친구가 남는다면 그것은 배우자일 확률이 가장 높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면서 동시에 가장 편한 사람, 내 허물도 모두 감싸줄 수 있는 평생의 내 편인 것이다. 사람 인(人) 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은 설득력이 크다. 사람은 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기댈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며 그 말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리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자원(물질은 물론 노력이나 시간도 포함된다.)을 내가 쓰는 만족감이 100%라 하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위해 사용할 때 갖게 되는 만족감은 120~150% 정도가 된다 하니 결국 우리의 뇌는 남을 위해 손해를 볼 때 더 행복하다는 보상을 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우리는 행복한 결혼을 하기 위해 나보다 내 배우자를 위한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내 짝을 위한 손해는 고스란히 행복이라는 생존에 유리한 도구가 되는 셈이다.

내가 열 번째 결혼을 성사시킨 사람은 나와 함께 파트너로 함께 일하고 있는 오주용 약사다. 성실하고 마음씨 착한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고 결혼을 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행복한 약사가 되고 싶어 찾아온 사람에게 행복한 약사가 되려면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큰 힘이 될 방법은 행복한 결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갖춰야 할 조건이 아닌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의 미래에 대한 지도(같이 바라볼 인생의 방향)가 첫 번 째며 그 지도에 같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나침반(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해 보며 살 마음’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좋은 사람을 만나 아이도 낳고 꾸준히 손해 보며 잘 살고 있다. 아빠로, 남편으로 손해를 보는 중이니 행복이 두 배가 되었다.

내가 말하려는 두 번째 손해가 바로 이 ‘출산과 양육’이다. 결혼은 양방향의 손해라면 출산과 양육은 일방적인 손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부모는 자식을 위해 인생을 바치고 헌신하는 것이다.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이의 생명이고 내 행복보다 우선되는 것이 아이의 행복이니 한 사람의 삶을 볼 때 이보다 더 큰 손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기 어르신의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해 보라 할 때 십중팔구는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 보니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생했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라고 하신다. 이는 단순히 지나간 고생의 시간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뇌가 부모의 삶을 살면서 손해가 클수록 더 큰 행복을 느끼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호르몬 중 하나이자 사랑과 유대감의 호르몬 옥시토신은 내가 아닌 내 주변을 위할 때 분비된다. (결혼한 사람이 손해를 기꺼이 보는 것도 사실 같은 이유다.) 임신 중인 엄마에게 높아지는 이 호르몬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이기게 해 주며 밤새 칭얼대는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할 때도 분비가 촉진된다. 아빠가 밤늦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아빠’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한 마디에 피로가 사라지고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이 호르몬 때문이다. 그러니 출산과 양육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러한 행복감의 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국 손해를 봐야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은 그만큼의 고통을 경험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출산과 양육은 단순한 위로와 응원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결국 생리학적으로 유전자가 우리에게 내리는 상과 벌을 논할 수밖에 없다. 대게 2~30대의 미혼 남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산다. 자신의 생존에 대한 안정감이 없이 어찌 출산과 양육의 여유가 생기겠는가? 그렇게 40대에 접어들면 생활의 안정과 비례하여 평온과 행복이 찾아와야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미혼 남녀의 걱정은 결국 유전적 명령을 거부한 데에 따른 벌로 불안감과 절망감을 받게 된다. 인간의 생존의 이유가 유전자 전달자라는 정의는 매우 잔인해 보이지만 그 명령체계를 따랐기에 인류는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자손을 둔 세대는 자신의 죽음이 영원한 종말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나의 자손이 세상에 이어진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게 된다. 하지만 2~30대의 자신을 위해 4~50대의 자신을 희생시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결과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출산과 양육은 손해 볼수록 행복해지는 삶이 아닌 무시할수록 불행해지는 의무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간의 수명이 길어진 반면 출산과 양육이 가능한 시간은 이에 비례하지 않기에 유전자는 이 정도의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혼도 손해고 출산도 양육도 손해다. 하지만 그 손해가 주는 행복이 나 혼자의 삶보다 더 크고 그 손해들이 모여 결국 우리 모두의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는 유전자가 우리에게 베푼 최고의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오로라를 보러 북극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은 딱히 없다. 누가 보내준다 하더라도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가볼 생각도 없다. 아이의 삶이 선으로 이어지고 어른의 삶이 면으로 확장이라면 결혼은 입체로 진화하는 것이고 출산과 양육은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터지는 인생의 향연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나는 오로라보다 영롱한 아이들의 영혼을 아이들의 눈을 통해 경험할 수 있고 부모라는 자격을 통해 내 아이의 우주가 되어 살게 되기 때문이다. ‘같은 나이면 결혼하고 애를 낳은 사람이 어른이다.’라는 말은 빈 말이 아니다. 그들의 눈엔 깊이가 있고 여유가 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부모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이 맛을 전달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고 싶다. 나는 손해 보는 행복을 만끽하며 살고 있는 커플 카운슬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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