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라지는 기분

세상의 중심이 바뀌는 대지각변동에서 살아남기

by WAYSBE

당신의 삶의 중심은 누구인가요? 저의 현재 삶의 중심은 저의 두 아이들입니다.(어쩌면 남편을 포함해서 세 아이?) 엄마라면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어요. 지금도 완전히 괜찮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그래도 첫째를 낳아 기르던 첫 2년에 비하면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같은 힘듦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길...


아이 입장에서는 날 때부터 내가 엄마이겠지만.. 세상의 모든 부모가 날 때부터 부모는 아닙니다. 저도 아이를 낳기 전엔 세상의 중심이 저였어요. 생각해 보면, 마치 엄마가 되지 않을 것처럼 달려온 삶이었어요. 정확히는 엄마가 된 이후의 제 삶이 이렇게 달라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줄 알았죠. 저는 아이를 낳아도 제 삶의 중심에서 저를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오히려 육아 휴직을 하면 그 시간에 나를 위해 더 달리리라... 생각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육아를 만만하게 봐도 너무 만만하게 본 거죠. 육아를 준비할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육아에 무지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어쩌면 아빠가 된다는 것도, 디폴트 값이 '희생'이에요. 뭐 더 엄청나게 숭고한 사람이라서, 모성애나 부성애가 뛰어나서 희생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희생 없이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연세가 많으신, 이미 아이가 성인이 된 인생 대선배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그 희생보다 기쁨이 더 커지는 날이 오기는 오는가 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오십대, 육십대 분들을 많이 보았거든요.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은, 아이를 낳아 기른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디까지나 다 지나고 보니 그렇다는 말이지, 그 속을 허우적거리는 동안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를 다 키우고 떠나보내고 나니 그 시절이 좋았다, 정말 잘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바다 밖에서 파도를 보며 "바다가 참 아름답다." 혹은 "파도가 운치 있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그 파도 속에서 물을 꼴깍꼴깍 먹으면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헤엄을 아주 잘 치는 사람이나, 서핑을 미리 배운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이제 육아를 준비 없이 처음 하시는 분들은 '아름다운',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하는 동안에는 '꼭 죽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자책하지 말아요. 원래 힘든 것입니다. 지금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인생의 대선배님들도 다들 죽을 둥 살 둥 눈물 찍어가며 키우고,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고 나서야 "잘한 일이었노라." 말씀하시는 거니까요.


세상의 중심이 바뀌는, 인생의 대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시기인데 어찌 평온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육아를 처음 시작한 두 해 동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한국 나이로 서른일곱에 아이를 낳았으니, 서른 일곱 해를 나를 중심으로 살았거든요. 경력 10년이면, 어느 직장이든 한창 일 잘하고 능력을 키워나갈 때 아닌가요? 저 역시 그 무렵엔 학교에서 제가 해보고 싶은 교육도 적용해 보고, 학부모님들과 아이들에게도 인정받고, 교육청에서도 일을 하기 시작한 커리어로 따지면 이제 막 꽃이 피려고 하는 기분을 느낄 때였어요.

그러다 어느 날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이 끊어지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그동안 쌓아왔던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일을 아무리 잘해 왔던 사람도, 육아가 처음이라면 아무 베내핏이 없어요. "능력 있는 나"라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면 더 힘들어질 겁니다. 왜냐하면 육아는 처음인 당신은 이제 "능력치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거든요. 그러니 지금까지의 나는 사라지고, 새로운 나는 무력하기만 한 그런 상황. 열심히 컴퓨터 작업을 해서 문서를 작성했는데, 갑자기 저장이 되지 않은 채로 다운되었을 때의 황당함. 혹은 업무 주제가 갑자기 바뀌었으니 다시 작성하란 지시를 받았을 때의 억울함. 육아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를 떠나서 그런 상황에 놓인다는 것 자체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인 것이 당연합니다.


솔직히 육아휴직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제 커리어가 이렇게 맥이 끊겨버리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육아휴직을 하면, 남는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해야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어요. 제가 교사 외에도 꿈이 많은 나이 들어서도 하고 싶은 게 많은 꿈나무라서요. 그런데 막상 닥치니, 육아만으로도 죽을 둥 살 둥 힘들더라고요. 3년 이상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제정신이 아닌 것도 당연한 일 같아요.

아이를 낳기 전엔, 아이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는 엄마들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10년만 키우면, 다시 커리어가 그리워질 수도 있는데, 그걸 못 견딜까,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이를 낳고도 커리어를 지키는 엄마들을 보면 그이들이 더 대단해 보입니다. 저 역시 커리어를 지키지 못하는 엄마가 되고 보니요. 공무원이라 그나마 잘리거나 그만두지는 않아도 육아가 병행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이를 낳기 전에 쏟았던 열정을 쏟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요. 아이와 어린 시절을 함께 하는 것이 저에겐 더 소중하다고 느껴져서요. '희생'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가끔 내가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슬퍼질 때가 있습니다.


혹시 '내가 사라지는 기분' 때문에 힘든 분이 있나요? 세상의 중심이 바뀌는 대지각변동, 그것도 그 중심이 나였다가 타인이 되는 스트레스의 한복판에 있는 당신에게, 힘을 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 대지각변동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몇 가지 말씀드릴게요. 사람마다 방법이 다르긴 하겠지만, 제가 살아남기 위해 썼던 방법을요.


1.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기. 모성애가 부족하거나 엄마가 적성이 아니라서가 아닙니다. 수십 년간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오다가 아이가 중심이 되는 지각변동을 준비 없이 겪고 계시니 당연한 것입니다.


2. 한계 설정하기. 내가 육아에 쏟고 싶은 시간과 노력의 한계를 설정하고 실천하세요. 예를 들어, 3년(혹은 3달)만 아이에게 올인하겠다, 혹은 하루에 2시간만 아이에게 올인하고 내 커리어를 지키겠다. 찾아보면 방법은 있습니다. 제도를 이용해도 되고 주변에 도움을 청해도 됩니다. 아이와 24시간 함께하는 우울한 엄마보다, 하루에 2시간 최선을 다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엄마가 아이의 정서에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3. 현재 상황이 '희생'이 아닌 '선택'임을 자각하기. 아이를 낳은 것부터 내 선택입니다. 만약 커리어 대신 육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면 그것도 내 선택입니다. 그 선택으로 얻는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해서일 겁니다. 선택에는 책임과 대가가 따릅니다. 그것은 선택한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육아를 선택한 것에 따른 대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 판단되면, 다시 2번으로 넘어가서 '한계'를 재설정하세요.


4. 처음이라 서툰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내가 육아를 잘 못한다고 해도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이 무능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 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잘해 보려고 하는 당신은 멋진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세요.


5. 어차피 하기로 결심했다면, 육아가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 알기. 몬테소리 교육을 공부하면서 저는 육아가, 한 아이를 잘 길러내는 일이, 커리어를 쌓는 일 못지않게 멋진 일이라는 위로를 받았어요. 아동 발달이나 교육심리학을 공부해도 좋아요.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육아를 하다 보면 남들이 직장에서 일을 할 때만큼 인정도 잘 안 해주고, 돈이 벌리지도 않아서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 내가 얼마나 가치로운 일을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야 해요. 절대로 지켜내야 하는 것이 자존감입니다. 그래야 당신의 내면이 건강할 수 있어요. 자부심을 가지고 육아를 하세요.


비록 이전의 저는 사라지고, 저의 세상의 중심은 바뀌었지만,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을 하는 저 자신을 스스로 존중하기로 했어요. 그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습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저는 지금 아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기분은 좀 나쁠지언정 흔들리진 않을 거예요. 처음부터 다 쌓아 올려야 하는 과정이지만 제가 ‘선택’ 한 것임을, 힘든 이유가 희생이 아니라 제 선택에 대한 책임임과 대가임을 알기에 억울하기보다는 마땅히 해내야 하는 도전 과제로 느껴집니다.

육아로 힘든 세상 모든 엄마, 아빠들,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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