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까지 이룬 게 무엇이지?

회사 다닐 때보다 더 힘든데 보이는 성과가 없어

by WAYSBE
육아가 회사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명확성의 정도가 다릅니다.

회사일은 비교적 명확해요. 그 일이 명확한지 아닌지는 '일의 목록을 작성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어요. 회사일은 보통 오늘의 'to do list'를 작성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씩 체크해 가며 일이 줄어드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낄 수 있죠. 일이 많다면 생색을 내기도 좋아요.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보여 주며, "이렇게 일이 많으니 야근을 할 수밖에 없어."라고요.

그런데 육아는 어떤가요? 육아에서 할 일은 회사일과 비교했을 때 불명확 합니다. 당장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죠. 아기가 오늘 똥을 몇 번 쌀지, 오늘 열이 날지 안 날지, 오늘 얼마나 보챌지, 아이가 오늘 나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알 수 있는 분? 없습니다. 없어요! 오늘 아이와 보낼 하루를 계획해도,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확률이 회사일에 비해 매우 높습니다.

장기 계획은 더 안 맞습니다. 내가 우리 아이가 12개월에 걷게 하고, 18개월에 말하게 하고, 3살에 한글을 가르쳐볼 계획을 하면 아이가 그렇게 하나요? 내가 노력을 하면 아이를 내 계획에 짜 맞출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이의 삶을 살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육아니까요. 그냥 관찰을 하며 기다리고, 아이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이 육아를 할 때 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MBTI로 따지만 'J력'이 강하신 분은 육아를 할 때 미칠 것 같다고 표현합니다. 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둘째, '부모의 육아'는 일의 범위도 불명확합니다.

'육아'라는 일을 일의 성격에 따라 하위 범주로 나누어 봅시다. 돌봄, 놀이, 교육, 집안일 등이 육아에 포함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각 하위 범주를 전문으로 해주는 서비스들이 존재합니다. 베이비 시터나 방문 교사라면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할 일의 범위가 비교적 명확하지요.

그러나 '부모의 육아'는 일의 범위도 불명확해요. '육아'를 한다고 했을 때 필수이나 최소한의 조건은 '돌봄' 하나입니다. 하지만 돌봄만 하는 부모는 없죠. 그리고 돌봄에 비중을 가장 크게 싣는 부모도 없습니다. 보통은 아이와 놀아주는 것에 집중하거나, 교육하는 것에 집중을 하기도 하고,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슈퍼부모들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보통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마련이에요. '돌봄'만 잘하고 있다면 나머지 세 가지 영역은 부모의 가치관에 따라 비중이 제멋대로입니다. 정답이 없어요.


셋째, 한 일의 양을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회사일은 하는 사람들은 오늘 한 일의 양과 어제 한 일의 양을 비교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아를 하는 사람들은 오늘의 육아와 어제의 육아가 어느 정도로 힘들었는지, 자신의 감정과 노고는 이야기할 수 있을지언정, 육아의 양은 비교하여 말하기 어려워요. 회사에서 일을 많이 하는 사람과 일을 적게 하는 사람은 딱 봐도 누구인지 티가 납니다. 그런데 육아는? 어느 엄마가 더 많은 일을 하는지 딱 보면 알 수 있나요?

일의 양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더 힘든 날에 인정을 더 받기도 힘들어요. 회사에서는 야근을 하면 야근 수당을 주기도 하고, 초과 근무를 하면 초과 근무 수당을 주기도 해요. 그런데 육아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더 힘들 뿐... 운이 좋다면 그 힘듦을 잘 공감해 주는 배우자가 인정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운이 나쁘다면 인정이 아니라 "네가 잘 못 키워서 아이가 예민한 것 아니야?", "수면교육이 안 되어서 밤에 잘 못 자는 거 아닐까?", "밥투정을 하는 것은 엄마가 쫓아다니며 먹여서 아니야?" 이런 소리를 듣기 십상이에요.

또는 양육자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일을 더 많이 하면 스스로 칭찬을 해주기는커녕, '내가 육아를 잘 못해서 이렇게 힘든 건 아닌가?'라는 질책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남들 다 하는 육아, 왜 나만 유독 힘들지 하고요. 일의 양을 계산하기가 어려우니, 내 일의 양이 더 많다고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거지요.


넷째, 성과가 늦게 나타납니다.

회사 일은 비교적 성과가 빨리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성과에 따라 성과급도 받을 수 있습니다. 고생을 하더라도 금융 치료를 받게 되면 다시 일할 맛이 나기도 하지요. 또, 성과가 바로 나타나니 반성도 빠르고,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워서 수정해 나가기도 보다 수월해요.

그러나 육아는 성과가 늦게 나타나요. 0-3세의 결핍이 사춘기가 되어서 나타나거나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 나타나기도 해요. 심지어 어린 시절에는 성과라고 생각했던 일이, 성장하면서 부작용을 만들기도 합니다. 내가 어떠한 육아관이 맞다고 생각하며 꾸준히 수년간 혹은 십 년이 넘게 실천해도 그것의 성과가 당장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정받기도 힘들고,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육아관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도 성과가 잘 안 보이니,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 혹은 '내가 한 게 뭐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해요.


다섯째, 효율성 측면을 보고 일을 처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일수록 이 점이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내 연봉이 얼마인데, 몇 년을 아이만 돌보며 지내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돈으로 계산을 하면 내가 나가서 일하는 것이 맞는데,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돈으로 계산할 수도 없고. 사랑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듯이 말이죠.

아이를 돌보는 일은 그 일의 내용만 보면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밤새 같이 누워 있는다.', '아이가 하는 말에 반응해 준다.', 이런 일들은 일의 내용만 보면, 정말 별 것이 아니에요. 너무나 가볍고 사소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수년간 꾸준히 하면 내 시간과 체력이 다 소진되기도 해요. 또는 아이와 밥을 먹네 마네 하고 말다툼을 하다보면 나까지 유치해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남들에게 넘기기도 어렵습니다. 단지 밤에 같이 잠을 자고, 말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시간들을 쌓아서 아이와 관계를 맺는 중이잖아요. 누가 나 대신 내 아이와 정을 쌓고 관계를 맺어 줄까요?

회사에서는 연차가 쌓이고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 사소하고 가벼운 일들은 막내에게 맡기거나, 용역을 씁니다. 그러나 육아에서는 사소하고 가벼운 일들에도 내 시간을 오롯이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보니, 효율성을 생각하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 물질만능주의와 효율성이 중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그런 생각으로 의식이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여섯째, 중요도는 최상인데, 준비도는 하인 상태로 투입됩니다.

내 아이를 기르는 육아의 중요도를 '하'로 잡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내 아이를 잘 기르는 일은 어느 부모에게나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에요. 때로는 오랜 시간 준비하고 갈고닦아온 커리어를 포기하고 육아를 선택하기도 할 만큼 중요도는 '최상'이지요.

회사라면 중요도가 최상인 일에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인력을 투입할까요? 그런데 육아는 개인들에게 중요도는 '최상'이나 준비도는 '하'인 상태로 일에 투입이 됩니다. 그나마 '최하'라고 하지 않은 것은, 임신 중에 나름 육아에 대해 준비는 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막상 아이를 낳으면 '내가 임신했을 때 무엇을 준비한 거지?' 싶을 정도로 준비 안 된 나 자신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 아니어도 그 일에 준비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난이도가 극상이에요. 그렇다고 다시 준비하고 와야지, 리셋하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회사일은 버거우면 사표라도 쓸 수 있지만 육아는 그것조차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육아를 하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중요도는 개인적으로 '최상'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인정 못 받고,
일의 내용도, 범위도 명확하지도 않으며,
한 일의 양을 계산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성과는 수십 년 후에나 알 수 있는 데다가,
매우 비효율적이고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내 모든 시간과 노력을 올인해야 하는 일에
준비도는 '하'인 상태로 투입되어 계십니다.


그러니 어떤 생각이 찾아올까요? 대단히 긍정적인 사람이라도, 이런 성격의 일을 수년간 하게 되면 문득 이런 생각이 엄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게 무엇이지?


특히 육아 경력 10년 이하인 분들은 이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고 해요. 성과도 나타나기 전이면서, 노력은 숨막힐 정도로 많이 투입되는 구간이거든요. 저에게도 그런 생각들이 종종 엄습하곤 합니다.


육아를 하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게 무엇이지?"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있다면 "'육아'라는 일의 성격 상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라는 위로를 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그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쓰고 있는 방법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첫 번째는, 아이를 다 키우신 분들이 '내가 제일 잘한 일은 아이를 키운 것이다.'라고 말하며 뿌듯해하시는 경우가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워낸 나이 지긋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하면, 비율적으로 그런 분들이 그렇지 않은 분들보다 많습니다. 일의 내용과 성과가 불문명 하더라도, '한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아이를 다 키우시고 나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거라는 믿음을 가지세요!

두 번째는, 성과가 잘 보이는 일 중 만만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투자해서 해보세요! 꼭 돈이 벌리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남들의 인정, 나의 만족이나 성장 정도) 성과가 눈에 명확히 보이면 좋을 것 같아요. 일의 성과가 나타나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삶에 활력소도 되어 줄 거예요.


저는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게 무엇이지?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룬 게 없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이 가치로운 일이에요.

그리고 지금처럼 글을 씁니다. 남들의 인정과 성과가 바로 드러나는 일을 하는 거지요. '라이킷'이 하나 달릴 때마다 도파민도 바로바로 흘러나옵니다.

남들의 인정이 고프지 않은 분들이라면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도 괜찮을 것 같아요. 대신 남들보다는 좀 더 특별하게 해 보는 거죠. 커피, 자수, 그림, 책, 요리, 맛집 등 주제는 무엇이 되어도 좋을 거예요. 내가 즐길 수 있고, 빠져들 수 있는 무엇이라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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