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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서 Aug 18. 2019

5. 나를 위해 사는 삶

<1장> 다들 이렇게 살 걸요

이 글은 청소년, 청년, 혹은 아직 진로를 고민하는 직장인을 위한 글입니다. 무슨 전공을 선택해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든 친구들을 위해 글을 써 봅니다. 제가 방황하던 시절 누군가가 옆에서 말해 주었으면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문이 닫히면 나갈 수가 없다. 압박감이 목을 죄어 온다.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듣기 시작하니 계속 듣고 싶었다. 편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3학년 1학기에는 지방에서 온 나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수업은 따라가기 어려웠다. 경제학과에서 국제통상학과로 옮겨왔기 때문에 기본기를 다지는 게 급선무였다. 서점에서 국제통상에 대해 최대한 쉽게 설명되어있는 기본서를 샀다. 그 책만 3번을 정독했다. 전공서를 보다가 모르는 게 나오면 다시 기본서를 펼쳐봤다. 뭐든 기본 개념을 확실하게 잡아두면 공부하기가 편해지기 때문이다. 1학기가 끝나고 학점이 나오자 친구들이 놀라기 시작했다. 학점은 4.16, 과에서 4등이었다. 동기들이 점점 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함께 과제를 하고 싶어 했다. 공부를 잘하면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님은 흐뭇하게 바라보셨지




시험 기간에는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그랬다. 3시간도 못 자고 잠이 덜 깬 상태로 학교에 갔다. 전공과목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반드시 A+를 받아야 했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암기용으로 정리한 노트를 보고 있었다. 노트에는 작은 글자들이 깨알같이 박혀있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단어들을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A의 정의가 뭐였지? B랑 C는 어떻게 연결되더라?’ 계속 되뇌이고 있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글자들의 의미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뒤죽박죽, 단어들이 엉켜버렸다. 이대로 가다간 시험을 망칠 것 같았다. 카페인 때문이었을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고...고장났나...?? 사랑인가??




강의실 문이 닫히자 숨이 가빠졌다. 11시 30분, 화이트보드에는 마감 시간이 적혀있었다. 교수님은 흰색 봉투를 열고 시험지를 꺼내셨다. 1분단의 맨 앞으로 가서 한 줄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몇 명인지 센 다음, 인원수에 맞게 시험지를 건네주셨다. 그렇게 2분단, 3분단이 지나고, 시험지가 앞사람의 손을 거쳐 내 손에 놓여졌다. 교실의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모든 움직임이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미색의 종이를 바라봤을 땐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두 손을 모아 코와 입을 막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노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시험만 잘 마치고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A+은 고사하고 아는 것만 다 쓰고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얼굴 옆을 따라 타고 내려왔다.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1번 문제를 봤다. 모르겠다. 2번을 봤다. 3번을…. 30분 동안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만 적었다. 평소였으면 시험지를 더 받아서 두 장은 꽉꽉 채워서 쓰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빨리 나가야 했다.





제발...... 제발요....




펑펑 울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눈물, 콧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시험을 망쳤다. 전공과목을 망했으니 2학기는 순위권 안에 들긴 틀렸다. 나에게 화가 났다. 왜 이런 증상이 생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으면 그나마 나았을까. 우는 그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추스러들지 않았다.


폐쇄공포증. 인터넷에서는 나의 증상을 폐쇄공포증이라고 했다. 증상은 일상생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어디서든 갇힌 공간에 있으면 숨을 쉬지 못했다. 지하철, 버스, 자가용을 탈 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때마다 숨을 헐떡이고 땀을 흘리며 온몸이 긴장됐으니까.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이 가장 공포스러웠다. 한 번 문이 닫히면 2분 동안은 탈출할 수가 없다.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정신과에 방문해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가볼까…. 아냐, 괜히 기록이 남으면 어떡하지. 취업할 때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닌가.’


처음 알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공포증을 겪고 있었다. ‘폐쇄공포증’이라고 검색만 해도 검색창에 2천 건 가까이 검색결과가 나왔다. 다들 어떤 이유로 심한 강박과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때문에 발병한 것 같았다. 해결방법이 없는지 찾아봤다. 페이지를 넘기며 글을 읽어보다가 누군가의 댓글 한 줄이 눈에 띄었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정신과라고 하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라도 기록이 남으면 평생 이상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나를 따라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도 했다. 몇 주를 고통 속에 살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니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하게 됐다. 아픈데 치료를 받지 않는 것만큼 바보 같은 것도 없다. 내 몸을 살펴보고 이상이 있다고 느끼면 바로 검사를 받아야 한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픈 부분을 치료해야 정상적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몸이 보내오는 신호에 집중하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가능한 한 빨리 몸을 돌보자. 





나이를 먹을 수록 이상 신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하철 10 정거장을 가는데 5번을 내렸다가 다시 탔던 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동네 정신과 의원에 갔다. '정신과 병원은 온통 하얀색으로 꾸며져 있지 않을까?' 괜한 고민이었다. 상상과는 달리 일반 내과랑 비슷했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상담카드를 작성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치료는 어떻게 진행되는 거지, 약값이 비싸면 어떡하지.’하고.


“연서님~”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네.”라고 작게 대답하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상담사 선생님은 하얀 가운을 입고, 얇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계셨다. 몇 가지 개인정보를 물으시고는 어렸을 때부터 기억나는 일을 모두 말해보라고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요?” 

“네, 아무거나 다 얘기해 보세요. 기억나는 때부터요.” 





모든 걸 얘기하게 되는 선생님의 눈





덤덤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얘기까지. 얘기를 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선생님은 듣기만 하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냥 혼자 얘기하다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엄마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부터였다.


공부를 잘했다고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날 보면 한숨만 쉬었다. 중학교 때부터 술을 마셨고 고등학교 때는 외박을 했다. 언니는 일찍 철이 들었고, 동생은 영재였다. 중학교 내내 전교 3등 안에 들며 특목고의 영재교육원을 다녔다. 동생은 가족의 자랑이었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미안해 동생....




처음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부모님의 기대가 느껴졌다. 그 느낌을 잊고 싶지 않아서 무조건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했다. 공부는 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점점 1등에 집착했다. ‘무조건 1등’이라는 마음이 나를 옭아맸다. 강박관념은 폐쇄공포증을 만들었다.


엄마 탓을 했다. 엄마 때문에 내가 망가진 거라고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태어난 것만으로 소중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으면 좋았을 텐데. 동생만 예뻐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말했다. 방 불을 모두 끄고 바닥에 앉아 엄마에게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폐쇄공포증을 갖게 된 이유가 엄마 때문이라고 했다. 엄마 때문에 내가 고장 났다고, 책임지라고 말이다.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엄마가 말했다. 


“엄마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섯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데…. 엄마는 연서를 사랑해. 엄마의 표현 방식이 잘못되었으면 미안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인데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 엄마가 어떻게 해야겠니.”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그때 깨달았다.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 자신이 아닌 남들의 인정을 구걸하고 자신을 동생과 비교했던 내 잘못이었다.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내가 나를 인정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런데 남을 탓했다. 그 날 엄마에게 상처를 줬다. 며칠을 더 울었다.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나 때문이 아니라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 때문에.


폐쇄공포증은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졌다. 갇힌 공간에 노출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렸다. ‘이곳은 안전한 곳이야, 곧 문이 열릴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생각하는 훈련을 했다. 이제는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다. 하지만 그날의 아픔은 잊혀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상처 줄 때의 아픔은.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누군가와 비교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외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인정을 바라지 않겠다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고.


내 삶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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