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다들 이렇게 살 걸요
이 글은 청소년, 청년, 혹은 아직 진로를 고민하는 직장인을 위한 글입니다. 무슨 전공을 선택해야 하고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든 친구들을 위해 글을 써 봅니다. 제가 방황하던 시절 누군가가 옆에서 말해 주었으면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 휴학계 냈어."
"정말? 결정한 거야?"
"응 나 반수 준비하게, 서울로 오려고."
”그래, 서울에서 만나자."
2명의 친구가 있었다. 강북에 사는 별님이, 분당에 사는 유라. 우리 셋은 죽이 잘 맞았다. 술도 좋아하고 공부도 좋아했다. 무엇보다 함께 서울을 그리워했다. 나는 공부를 못했던 게 맞는데, 둘은 공부를 잘 해오다가 수능을 망쳤다. 대전에서 같이 만난 게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꿈꿨다. 술잔을 부딪치며 '서울에서 보자~!'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학기를 시작하니 별님이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별님이는 휴학계를 냈다. 반수를 하겠다고 하고서.
목표가 생겼다. 집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목표가. 내게 반수의 선택지는 없었다. 모든 과목을 다시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편입'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띄었다. 2학년까지 다닌 후, 학교마다 실시하는 영어시험을 통과하면 다른 학교로 옮길 수 있는 제도였다.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만 판다면 다른 학교로 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고시원으로 이사를 했다. 전공과목은 최소한으로 신청하고 영어수업을 3개로 늘렸다. 강의실에서 듣는 수업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상수업도 듣기로 했다. 수강신청 날이면 무조건 PC방에 갔다. 그리고 PC 두 대를 켜고 수강신청을 했다. 수강신청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반드시 계획대로 시간표를 짜야 영어공부를 할 시간이 확보됐기 때문이다.
'학교에 오긴 오니?'
'그럼, 화요일하고 수요일만 가.'
'오긴 오는구먼, 얼굴 보기 힘들다잉~'
2학년 때는 수업을 화요일과 수요일에 몰아서 들었다. 집도 계약하지 않았다. 마침 고등학교 친구가 대전에 있는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에게 일주일에 하루만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같은 과 친구들은 자퇴한 거 아니냐며 카톡을 보내왔다. 어떻게 밥 한번 먹을 시간도 없고 술도 안 마시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좋았다. 목표가 있었으니까.
서울에서는 교대역에 있는 편입학원에 등록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5일 동안은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첫차에 사람이 많이 타는구나.'
마을버스는 새벽 6시에 첫차를 운행한다. 버스를 타러 나오면 이미 정류장에 줄이 만들어져 있다. 버스에 올라서면 발 디딜 틈이 없다. 일용직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새벽부터 나온 아저씨, 청소일을 하러 가는 아주머니가 많았다. 이렇게 누군가는 일찍 일을 시작하는데…. 새삼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교대역에서 내리면 배낭을 메고 영어단어장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면 걸음이 빨라졌다. 지하 1층에 있는 자습실에 자리를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도 학원생이군...' 단어장의 표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학원에 빨리 도착하면 6시 반, 그때 도착해도 지하 자습실의 자리를 맡기 어려웠다. 도대체 다들 몇 시에 집에서 나오는 걸까.
새벽반은 아침 7시에 시작했다. 자습실에 짐을 두고 강의실 문을 열면 탄성이 나왔다. 이미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터질 듯 들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다들 과거의 자신을 지우고 싶었던 걸까, 쉬는 시간의 일분일초도 아까워서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수강생들이 대다수였다. 영어의 8품사도 몰랐던 나는 1년 동안 그들과 동고동락했다. 해가 떠 있을 때 집을 나서본 적이 없다. 빛을 보는 건 점심시간뿐이었다. 종일 강의실에서, 지하의 자습실에서 영어와 살았다.
"언니, 위가 아파요."
"응?? 뭐 잘못 먹었어?"
"모르겠어요,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요."
"연서야, 이거 마셔봐. 맨날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그래."
운동할 시간이 없었다. 잠을 자고 이동하는 시간을 빼고 15시간을 학원에서만 있었다. 밥을 먹고 바로 앉거나 낮잠을 잤으니 위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을 거다. 그런 나를 보고 유진 언니와 경재 오빠가 위생천을 먹자고 했다. 위생천이라는 것도 처음알았다. 활명수와 비슷한 성분이지만 가격은 저렴한 소화제였다. 700원인 활명수는 사치였다. 500원짜리 위생천을 들이켜며 다시 강의실로 들어갔다.
편입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버팀목은 유진 언니와 경재 오빠였다. 언젠가 한번 언니, 오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우리 어떻게 친해진 거예요?”
“몰라, 기억이 안 나네….”
서로가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도 못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급속도로 친해질 만큼 죽이 잘 맞았고, 함께 있으면 웃음이 났고, 무슨 얘기든 편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새벽 수업시간이 끝나면 함께 단어시험을 봤고 점심을 먹었다. 밤 10시에 자습실이 문을 닫으면 지하철역까지 같이 갔다. 셋이 모이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살인적인 수업과 과제에도 언니와 오빠를 보면 힘이 났다. 같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들고 불안한 마음을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지가 됐다.
1년의 공부가 끝나고, 연말부터 연초까지 각 학교의 시험을 보러 다녔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엄마와 함께 결과를 확인했다. 사이트에서 수험번호를 치고 엔터를 누른 다음 재빨리 화면을 손으로 가렸다. 심장이 쫄깃해짐을 느꼈다. 열 군데를 지원했는데 벌써 5번째 ‘불합격’ 글자가 나왔다. 6번째 학교의 결과확인 버튼을 클릭하는 순간 드디어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나왔다. 엄마는 합격이라는 글자를 보고 또 눈물을 글썽이셨다. 내가 정말 붙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가고 싶은 곳은 모두 떨어졌다. 하지만 수도권에 있는 학교 두 군데에 합격할 수 있었다. 집에서 1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이긴 했지만, 마침내 대전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편입의 벽은 높았다. 그렇게 공부를 해도 임계점을 넘긴 어려웠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너무 안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법과 단어만 공부해도 1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마지막까지 독해는 자신이 없었다. 원하는 대학에는 떨어졌지만 목표를 이뤘다는 것에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나, 자퇴하러 왔다”
“니 정말 붙었나! 축하한데이! 내 심심해서 어떻게 사노.”
2008년 2월 16일, 대전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면서 멀리 보이는 캠퍼스를 바라봤다. 2년 동안의 기억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지나갔다. 학생처 문을 열고 상담 대기 중인 직원 앞으로 갔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라고 묻는 말에 대답했다. "저, 자퇴하러 왔어요."
1년이란 시간은 빠르게, 또 느리게 지나갔다. 듬성듬성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건 영어뿐이다. 영어에만 파묻혀서 살았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대전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깜깜한 거실, 초코파이를 먹다 울며 잠든 날, 몸만 간신히 눕힐 수 있던 고시원, 그리고 다이어리에 써두었던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는 문구. 이 한 문장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이 너무 힘들 땐 울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말했다.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학원에 가고, 잠들기 전까지 단어를 외우고, 쉬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한 자라도 더 보던 날들은 차곡차곡 쌓였다. 목표로 가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오로지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만 하고 어떻게 하면 서울로 올 수 있는지에만 에너지를 쏟았다. 1년 동안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왔던 경험은 성취의 기억으로 내 안에 남았다. 어떤 일이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나눠서 달려가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다.
일주일에 하루씩 재워준 고등학교 친구에게 고맙다고 하고, 남아있는 짐을 들고 서울로 왔다. 편입하는 학교에 입학서류도 냈다. 그리고 새 학생증을 받았다.
'00대학교 국제통상학과 3학년'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