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서 Nov 17. 2019

3. 나 좀 재워줄래?

 <2 장>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돌이켜보면 어학연수 생활과 유럽 배낭여행은 생존싸움이었다. 돈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 2008년은 금융위기였고 파운드화는 2,800원에 육박해 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1,450원이다). 남겨온 400만원이 200만원의 가치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국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살인적인 환율은 허기만 가실 정도의 음식을 먹게 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이 사먹었던 메뉴가 서브웨이라고 하면 믿겨질까. 대표음식으로 꼽히는 피쉬앤 칩스도 먹어 본 적이 없다.     


이대로라면 연수가 끝나자마자 집에 가야 했다. 목표는 1달 정도 유럽여행을 하고 가는 것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구들을 사귀기로 했다. 계획은 이랬다. 먼저 여행을 가고 싶은 국가들을 뽑는다. 어학원에 있는 학생들에게 어느나라 출신인지 물어본다. 여행 후보지의 국가에서 온 학생들이 있다면 무조건 페이스북 친구로 만들고 친해진다. 나중에 그 나라로 여행 갈 일정이 다가오면 메시지를 보낸다. ‘너희 나라로 여행을 갈 계획인데, 나 좀 재워줄 수 있니?' 라고. 이게 전부였다. 다만 이 계획에는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나의 형편없는 스피킹 실력이라는 것이.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은 대화를 끌어나가기 어려웠다. 타겟을 신입생으로 잡았다. 어학원은 영어를 배우러 오는 곳이기 때문에 유럽애들이라도 학원에 오는 친구들은 기초레벨인 경우가 많았다. "안녕, 내 이름은 쑤라고 해, 한국에서 왔어.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라고 수 없이 반복했다. 가끔은 이름을 묻는 것도 깜박하고 어디 출신인지 부터 물어보곤 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가 중요했으니까. 얘기하다가 조금이라도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싶으면 바로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다.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며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했다. 먼저 들이대(DID)는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만난 친구 중 한 명이 디아나와 루이스였다. 둘은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왔고 10년을 사귄 커플이었다. 2주만 있다가 스페인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디아나는 대화를 할 때마다 눈이 커지고, 웃음이 많고, 자주 놀라는 친구였다. 밝고, 밝고, 밝아서 나도 밝아지게 만드는 그런 친구. 하지만 같은 반도 아니었고 짧은 시간만 머물다가 가는 친구였기 때문에 가까워질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학원의 장점은 날마다 다른 소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월요일은 맥주를 마시며 친목을 쌓는 펍데이, 화요일은 신입생들과 함께하는 시티투어, 수요일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투어를 하는 문화의 날, 목요일은 마라톤이 진행됐다. 시간만 맞는다면 마음껏 참여할 수 있었다. 친구들을 사귀려고 매일 참여했고 자연스럽게 스텝처럼 활동하게 됐다. 새로온 친구들에게 반복해서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다보니 영어실력도 조금씩 늘었다. 그 곳에 디아나와 루이스가 있었다. 둘은 짧게 머무는 만큼 한 주에 진행되는 소셜프로그램에 전부 참여했다. 우리는 한 주 동안 계속 마주쳤다.     


“디아나, 나중에 스페인에 가면 나 좀 재워줄래?”

“그럼! 물론이지, 언제든지 놀러와! 오면 나한테 꼭 연락해야 해, 알았지?”     


디아나는 나보다 나의 방문을 더 설레했다.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다. 신기한 건 단어는 한정적이었고 문법은 엉망이었지만 서로가 하려는 말이 이해가 됐다는 점이었다. 순수한 의도로 친구가 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순수함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디아나가 집으로 돌아가고 3개월 후, 우여곡절 끝에 스페인에 도착했다. 혼자 유럽을 여행하고 한 달 만이었다. 내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속옷만 빨아서 겨우 입고 다니는 정도였으니까. 밥보다 맥주를 좋아해서 날마다 맥주를 마셨고, 6인실과 8인실의 도미토리를 전전긍긍하다 보니 잠을 푹 잔 적이 없었다. 캐리어를 잃어버릴까봐 조그만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디아나는 내가 온다는 소식에 나를 가이드 해 주려고 3일 동안 휴가까지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디아나, 이거 전부 네가 차린 거야?”

“응!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다.”

“잼이 도대체 몇 가지야?”

“몰라, 뭘 좋아할지 몰라서 있는 걸 다 꺼내봤어, 호호”     


살구 라임, 애플 시나몬, 무화과 등 종류별로 잼이 나와있었다. 토스트와 치즈, 햄을 곁들어서 한 달만에 여유 있게 식사를 즐겼다. 디아나의 집은 아늑했다. 그녀는 자기 침대까지 내어주며 편히 쉬라고 했다. 덕분에 첫 날부터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깨어보니 기분 좋은 향이 느껴졌다. 멀리서 디아나의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도 들렸다. 마치 이 곳은 안전한 곳이라는 신호처럼.      


“여기 마지막으로 언제 와 본 거야?”

“나? 사실 나도 처음 와보는 거야, 우와 너무 신나! 이것 봐봐, 쑤!”     


디아나는 자신이 살고있는 발렌시아를 보여주며 나보다 더 신나했다. 해양테마공원이 유명하다며 무조건 가봐야 한다더니 자기도 처음 와본다고 했다. 알고보니 이 날 갔던 곳은 '오세아노그래피코'라고 하는 유럽 최대규모의 수족관이었다. 우리는 펠리컨과 사진을 찍고 동물들에게 인사했다. 재밌는 표정으로 사진도 찍고 바닷가도 드라이브하며 맘껏 휴일을 즐겼다.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내가 돈을 내려고 하면 절대 낼 수 없게 했다. 미안한 마음에 음료수라도 사려고 하면 “쑤는 우리의 손님이야.”라며 극구 말렸다. 저녁을 먹으러 갔던 레스토랑은 딱 봐도 비싼 곳이었다. 전통음식인 빠에야와 화이트와인을 시키는 그녀에게 답답한 마음에 한 마디 했다.    

  

“여기 비싼 곳 아니야? 디아나, 나한테 너무 잘 해주는 거 같아,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니야, 덕분에 우리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오랜만의 휴가를 즐기는 중이야. 정 미안하면 한국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객에게 잘 해줘. 우리라고 생각하고 잘 부탁해, 그거면 돼. 호호.”     


디아나는 바라는 게 없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고 했다. 3일 내내 나를 발렌시아의 구석구석까지 데리고 다녔다. 집에 있는 동안에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침마다 방문을 열면 깨끗한 수건이 놓여 있었고 화장실에는 나를 위한 새 칫솔까지 있었다.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을 찾는 것이 내 고민이 되어있었다.      


떠나는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디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내 가죽 부츠가 들려있었다. 한달 내내 신고 다녔던 하나 밖에 없는 내 신발이었다. 알고 보니 전날 밤, 디아나가 신발을 깨끗이 닦아 놓은 것이 아닌가. 분명 굽은 거의 달아 있었고 가죽은 빛이 바랜 상태였는데... 하지만 그녀의 손에 있는 부츠는 새것처럼 반짝거렸다. 여행 중 처음으로 눈물이 났다. 디아나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나를 위하고 가족 이상으로 따뜻한 환대를 해주고 있었다.      


디아나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비행기 시간을 놓칠뻔 했다. 가까스로 울음을 멈추고 바르셀로나행 기차를 타러갔다. 그 때, 디아나가 울기 시작했다. 가지 말라고 며칠만 더 있다 가라고 했다. 정말 가고 싶지 않았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수한 의도로 친구를 사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사심없이 내게 잘해줬다. 만남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친구였다. 디아나가 오로지 바라는 것이란 내가 또 다른 여행자를 만나면 그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뿐이었다.      

한국에서도 외국인 여행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지하철에서 갈아타는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 교통카드가 작동하지 않아 개찰구에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외국인, 길가에서 지도를 펼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관광객까지. 이제는 어디서든 외국인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와드릴까요?”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건다. 필요한 것을 물어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도와주려고 한다. 대가로 바라는 것은 없다. 현지인인 나에게는 길을 안내하는 손짓 한 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는 말 한 번 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길에 여행자들이 남긴 미소만으로 충분하다. 고맙다고 말하는 그들의 인사 이상으로 큰 보람은 없다.     


나는 평생 갚아야 할 빚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전 07화 2. Yes or Yes 영국 생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