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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서 Nov 17. 2019

4. 벨기에서 와플을 먹을 수 없었다

<제 2장>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절망적이다. 예산이 점점 떨어져 간다. 벨기에에 도착하니 전화가 먹통이 됐다. 유럽에서 쓸 수 있는 유심이라고 했는데 왜 안 되는 거지. 예약해 둔 유스호스텔까지 주소만으로 찾아가야 했다. 가긴 가는데... 이 돌바닥은 어떻게 안되는 걸까? 배낭여행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유럽의 돌바닥이었다.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도 바닥이 온통 돌로 되어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갈 때마다 덜컹거려서 손목이 아팠다. 빨리 호스텔을 찾고 싶었지만,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와이파이가 되는 곳을 찾아 지도를 켰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유스호스텔은 어두침침했다. 밖이 오히려 밝게 느껴졌다. 배정받은 호실은 302호, 6명이 같이 자는 도미토리였다. 많이 묵어 본 2층 침대라 어색하지 않았다. 제일 오른쪽 침대 2층에 자리를 잡고 보관함을 찾았다. ‘어?’ 아무리 찾아도 보관함이 보이지 않았다. 보관함이 없는 도미토리였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주섬주섬 여권과 현금만 챙겨서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 층에는 당구대가 두 개 있었고 술을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당구를 치고 있었다. 실내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자 담배를 손에 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왠지 모를 싸늘함이 느껴졌다. 벨기에가 이런 도시인가. 아니면 벌써 여행에 지친 건가. 자주 바뀌는 환경과 사람들 때문에 긴장한 탓인 것 같았다. 시내를 구경하면 나아지질 거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 초콜렛 얼마에요?”

“12유로예요.”

“와플은 얼마예요?”

“5유로예요.”     


지갑을 보니 와플과 초콜릿 중에 하나만 골라야 했다. 와플을 사면 지금 바로 먹을 수 있었고, 초콜릿을 산다면 집에 선물로 가져갈 수 있었다. 두 개를 사기엔 예산을 초과한다. 벌써 10분째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벨기에 하면 와플 아닌가? 와플 먹으려고 온 거 아니야?'

'아니지, 초콜릿이 유명하잖아. 봐봐, 수제 초콜릿인데 5개가 들어있어. 가족들하고 나눠 먹으면 딱이겠다.'

'그래도 와플이 낫지 않을까? 궁금해, 먹어보고 싶어.'

'바보야, 집에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와플도 먹고 싶었고 초콜릿은 선물하기 좋아 보였다. 혼자 여행하면서 맛있는 것들을 먹고 다니니까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뭔가 들고 갈 수 있는 것이 있으면 하나 사야겠다’ 했는데 초콜릿이 보인 것이다. 그렇다고 초콜릿만 사서 나오기엔 와플이 눈에 밟혔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와플파이 부분이 보였다. 자, 이제 선택해야 했다.     


“엄마, 돈이 너무 없는데.”

“으이구, 벌써 돈이 없으면 어떡해.”

“미안해, 내가 한국에 가서 아르바이트하고 갚으면 안 될까?”  

  

엄마한테 늘 미안했다. 돈 벌어서 어학연수랑 여행도 하고 오겠다고 떵떵거렸던 나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환율도 그랬고, 일정을 맞추느라 비행기나 기차표를 구매하는데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힘든 내색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은 낭만적이지 않았다. 친구들의 집에서 묵을 때는 좋았지만 잠깐이었을 뿐이다. 혼자 다니면 의지할 사람이 없다.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 내 발이 닿아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늘 확인해야 했고, 만나는 사람 중에 위험한 사람은 없는지 경계부터 해야했다.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곳에서는 물건들을 잃어버릴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삶은 여행과 닮았다. 여행지에서 내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삶에서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다. 목적지를 설정해야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다. 목표가 없으면 갈 곳을 잃어버린다. 목표를 재설정하고 가는 길을 짧게 나눈다면 거기까지 가는 방법을 다시 알아보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 할까?’ 여행 중에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이다. 복학하면 무엇을 할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수첩에 끄적이는 시간이 많았다.      


끝까지 완주하고 싶었다. 아무리 힘들고 예산이 없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목표한 나라들은 모두 돌아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이대로 한국에 들어가면 한 달 넘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었다. 취업하고 나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간 중간 친구들의 집에서 머무는 일정이 내겐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다음 목적지로 가게 만드는 쉼표가 됐다.      


목표를 이루는 과정도 비슷하다. 목표를 이루는 길이 너무 힘들면 쉼표를 찍어야 한다. 쉼표는 책을 읽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의지가 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우리 몸과 뇌는 충전이 필요하다. 복학한 후, 이루고 싶은 것이 많아질수록 나는 이런 방법을 사용했다. 에너지가 방전될 때마다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다시 앞으로 나갈 힘을 얻었다.      


벨기에 친구 토마스가 그런 역할을 했다. 보관함이 없는 유스호스텔에서 여권과 현금이 있는 가방을 끌어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토마스가 사는 나무르라는 도시까지 겨우 이동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였다. 기차역까지 나와 반겨주는 그를 보면서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날 저녁은 피곤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샤워만 하고 바로 잠이 들었다.      


친구들의 집을 가본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다. 현지 친구일수록 도심이 아니라 외곽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여행만 했다면 갈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브뤼셀에서 기차로 1시간 반 거리에 위치한 나무르는 한적하고 예쁜 동네였다. 집 대부분이 2층짜리 전원주택이었다. 가볍게 아침을 먹자 토마스가 나를 불렀다.  

   

“쑤, 자전거를 타보지 않을래?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정말? 자전거가 여러 대 있는 거야?”

“응, 창고에 많아. 내가 자전거를 좋아하거든. 이따 내 친구 잭도 소개해줄게.”     


토마스는 창고에서 튼튼해 보이는 자전거를 두 대 꺼냈다. 마당에서 잠시 타고 있으니 잭이 도착했다.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우리 셋은 골목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다. '벨기에에서 자전거를 탈 줄이야.' 세상 신기한 일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에 닿았다.     


“내가 어렸을 때 자주 갔던 곳이야, 여기 신기한 게 있어.”     


낙엽들을 스치며 산길을 뚫고 지나가자 넓게 트인 공간이 나왔다. 나무가 울창했고 굽이진 길은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앞장서서 달리는 토마스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터널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쑤, 그거 알아? 여기가 전쟁했을 때 피신했던 곳이래.”

“정말? 조금 무서운걸, 이게 무슨 마크야?”

“나도 정확히는 몰라, 군대에서 쓰는 거라고 들었어.”     


언제 벨기에에서 군인들이 쓰던 방공호 같은 곳을 볼까. 열심히 토마스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가 가는 곳을 따라다녔다. 골목골목을 구경하며 지나가는 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토마스! 이게 뭐야?? 양이야?”

“응 양 맞아, 이 집에서 양을 기르나 보다.”

“집에서 양을 기르는 거야?”

“그런가 봐, 조금 특이하긴 하네. 너무 귀엽다.”     


어느 주택에서 양을 기르고 있었다. 집 바로 옆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안에 양 3마리가 있었다. 양들은 하얀색 털을 복실거리며 입꼬리는 살짝 올린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메~'하고 소리를 낼 것 같았다. 너무 신기해서 자전거에서 내려 양들 앞으로 갔다. ‘양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것일까? 설마 양털을 가져가려고?’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가정집에서 양이라니, 정말 신기하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양 생각이 났다. 대관령 양떼목장에도 가본 적이 없던 때였다. 그날 밤 양 떼를 몰고 같이 자전거를 타는 꿈을 꿨다.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 토마스와 유명관광지인 시타델도 올라가고 특산 맥주인 블랑쉬도 마셨지만 내 마음에 남아있는 건 양이었다. 풀을 씹고 있는 귀여운 입모양이었다.      


나무르에서 충분히 힐링한 덕분에 다음 국가로 출발할 수 있었다. 몇 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가족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초콜릿을 개봉했다. 그 날, 와플을 포기하고 초콜릿을 샀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사오지 못했다. 하지만 벨기에의 설렘이 남아있는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여행 얘기를 했던 기억은 오랫동안 남았다. 돌바닥과 자전과와 양들의 얘기를.      


다만, 아직도 궁금하긴 하다….


벨기에 와플은 무슨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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