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서 Nov 17. 2019

5. 영국에 오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2 장>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고마워 쏘라.”     


비행기를 타기 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학연수 4개월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공항에서 날 배웅해 준 사람은 쏘라였다.     


“혹시라도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해.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친절해도 절대 따라가지 말고, 전화가 안되면 페이스북이나 이메일로 소식남겨주고, 알았지? 응?”     


쏘라는 마지막까지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이었다. 한국에서 올 때, 유럽여행에 관한 책을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다른 것만 챙겨도 한가득이었으니까. 영어로 쓰여 있는 여행책으로 계획을 짤 수는 없어서 한인중고거래 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마침 론리플래닛을 파는 사람을 발견하고 연락을 했다. 유럽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어떤 여자분이었다. 우리는 피카딜리의 어느 골목에서 만나 직거래를 했고 잘 지내라는 인사를 했다. 빨리 읽고 싶었다. 여행책을 꼭 끌어안고 한번 가 봐야지 했던 포일드 서점으로 갔다. 이 곳에 있는 카페에서 여행 계획을 세울 계획이었다. 

    

‘으으으음…. 여기가 어디지,’     


‘학교 중앙도서관인가...’하며 일어나는 찰나, 주변을 보니 온통 외국인이 보였다. ‘아, 지금 영국이지.’ 기억을 더듬자 여행계획을 세우다가 너무 피곤해서 졸았던 게 생각났다.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입이라도 벌리고 졸고 있던 것은 아닌가? 침을 흘렸나? 혹시 누가 본 건 아닌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왼쪽 맞은 편에 앉은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하이?”     


나도 모르게 '하이'가 튀어나왔다. 곧바로 후회했다. 분명 다 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빨리 일어나서 나가도 모자랄 판에 인사를 해버린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내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겨도 되겠냐고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 난 쏘라라고 해.”

“아, 난 쑤라고 해. 한국에서 왔어.”

“와, 한국? 정말이야? 난 미얀마 사람이야.”

“발음이 진짜 좋다. 영국사람 같은걸”

“어렸을 때 와서 그래, 가족들이랑 다 같이 와서 살고 있어.”     


그의 발음은 BBC 뉴스에서 보던 이상적인 영국발음이었다. 학원 선생님 발음이랄까. 신기해서 대화를 조금 더 나눴다. 쏘라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 사람은 처음 만난다고 했다.      


“시간이 괜찮으면 같이 대영박물관에 가도 될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응? 대영박물관?”

“응. 한국 사람에게 한국의 역사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나한테? 수능 6등급에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역사 교과서 표지를 염산으로 바꿨던 나한테?'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는 게 없다고 극구 거절하는 내게 쏘라는 집요하게 부탁했다. 부담 갖지 말고 아는 것만 얘기해 달라고. ‘내가 뭐라고…. 내가 잘 알려줄 수 있을까…. 아니, 그럼 한국인 대표가 되어 미얀마 친구에게 역사를 알려주게 되는 것인가?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면 어떡하지?’ 오만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다행인지 대영박물관 내의 한국관은 크지 않았다. 구경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쏘라의 질문이 잘 들렸고 천천히 대답해 줄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하는 말마다 귀담아듣고 다시 질문했다. 다행히 어렵지 않은 것들을 물어봤다. 한복은 언제 입는지, 지금도 결혼을 할 때 한복을 입는지, 한옥에서는 어떻게 생활하는지, 농사지을 때 쓰는 물건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 것인지 등등. 알려줄 수 있는 범위 내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못 한 것도 많았다. 오히려 역사가 아닌 부분에서였다. 한국의 인구가 총 몇 명이고, 서울의 인구는 몇 명인지 같은 부분이었다. 숫자로도 대략적으로 밖에 모르고, 알더라도 큰 수를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다. 북한과의 관계는?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교육시스템은? 쏘라는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이런 질문들을 받은 건 쏘라가 처음이었다. 역사부터 정치, 의료, 교육시스템까지 현재의 한국의 모습 전체를 궁금해 했다. 쏘라는 학구열이 높았다. 물론 아는 선에서 설명해줄 수도 있었겠지만 영어로 말해 본 적이 없으니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수치들은 Million으로 말해야할지 Billion으로 말해야할지 헷갈렸다. 종이에 쓰고 그림을 그려가면서 겨우 겨우 대답할 뿐이었다.      


쏘라와의 박물관 투어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 역사와 사회현상을 잘 알아야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것들을 영어로 얘기해 보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미리 공부해 두고 왔으면 좋았을걸. 당장 김치 담그는 법을 설명해 달라고 해도 영어로 말하기엔 머릿 속이 복잡해지니 말이다.  

    

박물관 투어가 끝나고 맥주 한 잔을 마셨다. 이후로도 쏘라와 같이 밥을 먹으러 다녔고,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도 만났다. 주말이면 근교에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우린 코드가 잘 맞았다.      


“실패가 있으면 성공이 있고,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어.” 

“최악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마.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거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비결이야.”

“너 자신을 믿어, 해낼 수 없는 일이란 없다고 믿어.”      


쏘라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명언 제조기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이 정도니까, 들었을 때마다 적었다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도 처음에 이민을 왔을 때는 영국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놀림도 많이 받았었다고 했다.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내일이 되면 또 괜찮아질 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고 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믿고,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영국에서 가정학 의사가 됐다.      


20대 초반에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을 꼽으라면 쏘라다. 고민이 있는 것은 모두 쏘라에게 말했다. 친오빠 같았다. 안 그래도 여동생이 두 명 있는 쏘라는 나를 흔쾌히 한국인 여동생으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늘 내가 답답해 할 때마다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 사람을 해외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행운이었다.     


“내가 집에서 여행책을 가져왔더라면,

그날 중고책 거래를 하지 않았더라면,

서점 안의 카페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때 졸고 있지 않았다면,

이 중 하나라도 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만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말하는 내게 쏘라는 한마디 했다.      


“그렇다고 나랑 대영박물관에 갔던 것처럼, 다른 사람은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쏘라, 너...친오빠 맞구나….’

이전 09화 4. 벨기에서 와플을 먹을 수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