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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인생, 허수가 될 수는 없잖아

수화통역사 실기시험을 준비하며 느낀 것

by 귀로미

2024년 10월 16일, 수화통역사 실기시험 날이다. 따사로운 햇살 속, 수험표를 손에 꼭 쥔 채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실기는 필기통역, 수어통역, 음성통역 3과목을 봐야 한다. 1교시 필기통역을 마치고 약 500명 정도 되는 수험생이 한 대기실에 모였다. 대기실은 수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작은 세상 같았다.


긴장과 설렘,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수어 책을 펼쳐보며 차례를 기다리던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사람들 중 진짜 고수는 몇 명이나 될까?"


그들 가운데 진짜 준비된 사람은 어쩌면 고사장에 한두 명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수들은 요약노트를 가져왔고, 조용히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시험에 몰두 준비했다. 말없이 집중하는 그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준비된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허수’였다. 전공서적처럼 두꺼운 책을 챙겨갔고, "경험 삼아 보는 거야",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았다. 마음 어딘가에서, 혹여 떨어지더라도 내 능력 부족이 아니라 준비 부족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막상 시험을 보니 문제는 예상보다 쉬웠다. 점수와 상관없이 준비만 잘하면 그리 어려운 시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시험이 어렵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허수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태도는 결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불합격이다. 합격률 3.8%, 응시인원 중 18명이 붙었다. 얼마나 많은 허수가 존재한 것일까.


허수(虛數). 수학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수를 뜻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허수가 존재하는가. 임용을 준비할 때도 그랬다. 경쟁률은 11:1이었지만 정말 11:1이었을까. 그냥 경험 삼아 보려는 사람, 주변 기대에 어쩔 수 없이 나온 사람처럼 다양한 허수가 존재했을 것이다. 진짜 치열하게 준비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허수(虛受)의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 남이 하라니까,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서 선택한 것. 내가 정말 원해서가 아니라 남의 기대와 시선 때문에 선택한 길, 이게 정말 허수 아닐까.


어떤 집단에 들어가 생활하다 보면 다수가 원하는 것이 곧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서울수어전문교육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수어통역사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건지 묻지도 않은 채,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커졌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걸까?"

고요한 시간에, 솔직하게 나에게 물었다.

답은 명확했다.

'아니.'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수어로 자유롭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격증은 수단일 뿐, 나의 목적이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자격증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수어를 잘한다고 증명해 주는 '증'에 불과했다. 어떤 공식적인 활동을 하거나, 전문가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면 필요하겠지만 나에겐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왜(why)가 없으면 동력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다. 선택했기에 필기시험은 열심히 준비했지만,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기에 날이 갈수록 실기시험 준비는 흐지부지됐다. 지금은 나만의 why를 가지고 수어교원양성과정 수업을 듣고 있다. 어렵지만, 적어도 남의 기대가 아닌 나의 소망을 따라가고 있다.


내가 정말로 잘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허수가 되고 싶지 않다.

타인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목소리에 집중해야 허수가 되지 않을 것.

욕심부리지 말고 한 번에 하나씩, 오로지 내가 선택한 일에만 집중할 것.


당신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정말로 당신이 원해서 하는 일인가?

여러 핑계와 타인의 기대 속에서, 허수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내 인생에 허수를 두고 싶지 않다.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한 번뿐인 인생,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내가 선택한 삶의 실수(實數)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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