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시로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길
"시란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황인찬 시인은 그림책『시, 그게 뭐야?』의 추천사로 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래서인지 시를 보면 그 앞에 머물게 되고 삶을 돌아보게 된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이 문장을 곱씹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요하게 멈추는 시간, 지하철역 스크린엔 시가 있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치고, 또 누군가는 시 앞에 머무른다. 나는 천천히, 마치 마음을 어루만지듯 한 글자 한 글자 읊조린다. 어느 날은 지하철 1-1부터 10-4까지 따라가며 시를 읊는다.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나면 한 장 두 장 사진도 찍는다. 그렇게 핸드폰 사진첩은 시로 한가득이다. 한 줄의 시는 하루를 견디게 했고, 또 어떤 시는 어느 날의 추억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한다. 이 시들이 수어로 표현된다면 어떨까? 손과 표정으로 전하는 시, 누군가는 그 시 앞에서 멈추고, 또 누군가는 그 시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만난 수 있을 텐데.
수어를 배우며,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손으로 말한다는 것은 세상을 더 섬세하게 바라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었다. 수어를 배우면서 세상이 더 넓어지고 촘촘해졌다. 수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감각이자 시였다. 수어시를 처음 만들 때,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다.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자꾸만 내가 가진 언어로 할머니를 그린다. 그림, 영상, 글 등으로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풀어낸다. 할머니는 내 마음의 첫 시였다. 내가 말로 다하지 못한 사랑과 그리움을 수어시로 다시 풀어낸다.
어느 날 지하철역 시 공모전에 도전한 적이 있다. 내가 누군가의 시 앞에서 머무르며 치유받았던 것처럼, 할머니에 대한 시가 누군가의 아침을, 또 누군가의 밤을 잠시 멈추게 해 주길 바랐다. 결과는 탈락이었지만, 그 마음이 여전하다. 수어시를 촬영한 후에는 더 그랬다.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쓴 수어시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에게>가 널리 퍼져 할머니가 볼 수 있는 곳까지 닿았으면 했다.
뉴질랜드에 연수를 갔을 때, 지하철역에서 수어 영상을 봤다. 짧은 교통 안내 영상이었지만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건 수어가 하나의 언어로 존중받는 장면이었다. 수어가 낯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디서든 수어를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왜 우리는 아직도 공공시설에서 수어를 찾기 어려운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수요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수니까 굳이 수어 영상까지 제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이기 때문에 더 필요한 것 아닐까. 공공의 영역이란 소수가 소외되지 않도록 모두를 수용한 영역이니까.
언젠가 지하철역에서 수어시를 보게 되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지하철 스크린에 커다란 큐알코드가 새겨져 있다. 읽을 수 있는 건 시의 제목과 작가 이름뿐. 사람들은 궁금한지 하나 둘 핸드폰을 꺼내 큐알에 접속한다. 핸드폰 속 수어시를 보며 사람들은 거기에 머문다. 수어시를 보며 멈추는 사람들,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진다. 핸드폰으로 큐알을 찍고 들어가지 않더라도 스크린에 수어시가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조금은 현실적인 상상을 해본다. 하나의 큐알이 세상과 또 하나의 세상을 연결하는 창이 된다면, 서로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만든 수어시가, 그저 내 안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그 시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아 말없이 안아주는 손길이 되어주길.
그리고 바란다.
수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로 다가가길. 소리 없는 감동이 더 크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