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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로 소통하는 세상 속으로

농인 교회에 다녀와서 느낀 것

by 귀로미

‘누군가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분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다. 수어통역사 실기시험 날, 대기실에서 만난 H 장로님은 “수어에 정말 진심이라면, 제가 존경하는 분을 소개해 드릴게요.”라며 처음 본 나에게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분을 선뜻 소개해주셨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분을 연결해주시려고 한 걸까. 그 마음이 낯설었지만 감사했다.


그 인연을 따라, 다음 날 아침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9시 9분 전철을 타고 교회로 향했다. 10시 30분, 도착하자마자 L 사모님을 찾았다. 사모님은 날 보자마자 반갑게 맞아 주셨다. 너무 잘 왔다며 반겨주시는데 해사하게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운 분이셨다. 교회를 둘러보는 내내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수어로 말을 걸어왔다. “처음?”, “청인?” 처음 보는 이방인을 향해 이토록 많은 관심을 보이다니, 참 따듯한 분위기였다.


이 교회는 단순한 예배당이 아니었다. 농인의 삶이 중심이 되는, 오롯이 ‘그들의 세상’이었다. 1층은 주차장, 2층은 카페와 사무실, 3층은 각종 모임 공간, 4층은 예배실. 이곳엔 서울뿐 아니라 인천, 천안 등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닌 교회라며, 대부분 30년 가까이 다니셨다고 한다. 매주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는 이유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선 수어가 모든 것을 채웠다. 내가 여태 만나보지 못한 ‘또 하나의 세계’였다. 농인의 세상, 그곳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내가 ‘소수’가 된 것 같은 느낌, 나는 그저 그들의 세상에 초대받은 ‘청인’이었다. 그동안 당연히 여겨왔던 소리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나는 '낯선 존재'가 되었다.


이전에도 수어통역사 실기시험 대기실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거긴 수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청인들의 공간’이었다. 모두가 수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같았지만 여긴 찐 그들의 세상이었다. 진짜 농인의 삶이 흐르는 세상, 그들의 신념과 역사, 그리고 언어가 있는 곳이었다. 농인들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잘 보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장애인’이라 부르지만 듣는 세계에서만 ‘장애’ 일뿐, 소리 없는 세계에선 오히려 수어를 잘하지 못하는 내가 장애인이었다.


영화 <다운사이드 업>이 생각난다. 23번째 염색체가 3개인 다운증후군 세상에 염색체가 2개인 사람이 태어난다. 다운증후군이 당연한 세상에서 ‘비다운증후군’인 에릭은 소수라는 이유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기준이 바뀌면 그 경계가 뒤집힌다. 여기선 내가 그런 존재였다. 이 교회에 청인은 약 10명 정도. 이날 만났던 두 분은 농학교에서 일하는 특수교사였다.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은 경계가 뒤집힌 이 세상에 왜 가는 걸까.’ ‘나는 왜 여기까지 온 걸까, 무엇이 자꾸만 날 이 세계로 이끄는 걸까.’


농인들은 청인들이 교회에 오면 살뜰히 챙겨준다고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버티나 보자'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교회를 찾아오는 청인들에게 마음을 줬다가 어느 순간 발길을 끊으면 그들은 상처를 받았다. 그건 따뜻함을 주고 사라지는 이들에 대한 상처였다. 마음을 여는 것도 힘든데 그 마음을 허공에 흘려보낸 경험이 많았기에, 그들의 마음에 조심스러운 벽이 생긴 것이다. 그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수어를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으로 이 세계에 발을 들여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예배 시간,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에 의문이 가득했지만 이 세계가 필요한 건 확실했다. 이곳은 단지 예배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도 괜찮다는 '정체성 회복'의 공간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이곳이 농인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곳, 그들이 '정체성'을 찾는 곳이었으면 한다.


나는 농인들이 '청인이 다수인 세상'에서도 정체성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수어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으로.

오늘의 이 마음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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