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내게 준 가르침, 누구나 귀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길을 단 한 번만 걸어갈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이거나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지금, 여기에서 베풀어야 한다."
살면서 귀인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귀인이라 하면 흔히 내 인생을 바꿀 정도로 큰 영향을 준 사람을 떠올린다. 귀인을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지녔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거울 같다. 내가 상대를 귀하게 대할 때, 상대도 나를 귀하게 여길 확률이 높아진다. 결국 내가 세상과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에 귀인이 나타나는지 아닌지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전에서 '귀인(貴人)'은 '귀할 귀, 사람 인' 즉 '귀한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귀인을 내 삶에 초대하는 방법은 먼저 내가 나를 귀하게 대하고, 나를 대하듯 다른 사람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느 날, 그런 귀한 경험을 했다.
수어 시 영상 촬영을 하고 온 날, 수어를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깊어졌다. 그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고 실기 시험 날 만났던 H 장로님께 연락을 드렸다.
“장로님, 오늘 수어 시를 촬영하고 왔어요. 부족하지만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고, 수어를 더 깊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어통역사 실기 시험 날 해주신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다가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인생이란 길 위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과 마주할 때가 있다. 그들은 마치 하늘이 맺어준 인연처럼 다가와, 서로에게 귀인이 되기도 한다. 장로님은 시험 날 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결해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 그 말뜻을 다 헤아리진 못했지만, 우리가 아주 낮은 확률을 뚫고 만난 건 사실이었다.
교회라니, 내 발로 교회에 간다니! 누군가 억지로 가라고 했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텐데, 교회에 가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내가 낯설었다. '신이 뜻하신 게 있겠지,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는 거겠지' 내가 세상에 잘 쓰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갔다. 농인교회에서 또 다른 인연, L 사모님을 만났다. 모두가 청인 편이지만 농인의 편에 서서 살겠다 하시는 분, 어떤 분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영상과 실제가 같은 사람, 그분 덕분에 교회 사람들과 기분 좋은 첫 만남을 나눌 수 있었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할아버지가 개찰구 앞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셨다. 무엇 때문인지, ‘농인인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스쳤다. 조심스레 수어로 말씀드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 순간, 할아버지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처음 본 나에게, 마치 오래된 귀인을 만난 듯 환한 표정을 지으시며
“수어 파?(너 수어 할 수 있어?)”
할아버지의 표정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자신의 제1언어, 수어로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이렇게 귀하게 대해주시다니, 할아버지는 나를 만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내, 마음이 뭉클해졌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반갑게 그리고 귀하게 대해준 게 언제였지. 이내 나는 사람을 귀하게 대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서로를 귀하게만 대해도,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 사랑이 가득할 텐데... 이 장면은 내게 또 한 번 확신을 줬다. 수어는 정말이지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언어라는 것을.
잠시 후, 다시 ‘한국어로 가득한 세상’에 돌아왔다. 온 세상이 수어로 물결치던 농인교회에의 시간은 이제 나와 몇몇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수어가 소수의 언어인 세상에선, 수어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귀한 사람이 되었다. 당신이 수어를 안다면, 또 누군가에게 귀한 사람, 그러니까 귀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 만났던 할아버지의 표정을 또 한 번 보고 싶어, 다시 수어를 향해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것이 내가 누군가에게 귀인이 될 수 있는 한 방법이지 않을까.
우리는 인생을 바꿔줄 귀인을 만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귀하게 대하지 않는 한 나에게 귀인은 없다.
누군가 짜잔! 하고 나타나길 바라기 전에, 내가 누군가에게 귀인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귀인을 만나는 일보다, 누군가에게 귀인이 되어주는 일이 더 값진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귀인이 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나를 귀하게 대하듯 그 사람을 귀하게 대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