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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군가의 프라이드란다

수어 하는 아이를 보고 느낀 것

by 귀로미

"내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기억한다면,

나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텐데...

그러니 잊지 마. 너는 누군가의 프라이드란다."



수어시 촬영날, 어린아이가 수어 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아이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낯설어서인지, 잠에서 덜 깨서인지 엎드려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장난을 걸자 아이는 수어로 '하지 마'라고 말한다. '앗, 내 심장...' 조그만 손으로 수어를 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치명적 귀여움에 심장이 아팠다. 아이도 본인이 귀엽다는 걸 알고 있을까.


수어 선생님의 자녀, 아이는 '코다'다. CODA는 Child of Deaf Adult의 줄임말로, 보통 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를 코다라고 부른다. 이들은 부모와 소통하기 위해 수어를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음성언어를 배운다. 그래서 수어와 음성언어, 두 세계를 동시에 품고 산다. 말도 잘하고 수어도 잘하는 아이,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럽고 똑 부러지게 키운 걸까. 나는 그 자체가 경이로웠다.


수어를 배우기 전까지는 농인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농문화를 접하고 나서야 그들의 육아가 얼마나 치열하고 또 정성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한 농인은 아이가 밤에 울어도 소리를 듣지 못하니, 아이와 실을 연결해 아이의 움직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 실 한 가닥에 부모의 간절함과 사랑이 얼마나 담겨 있었까. 기술의 발달로 지금은 다양한 보조기기와 감지 시스템이 도와주고 있지만,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여전히 많은 용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아이에게 수어로 "이름이 뭐야?"하고 물었다. 아이는 자그마한 손으로 '산' 모양 수형을 만들어 코에 대고 이름을 표현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손짓이었다. 선생님에게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물었다. 보통 수어 이름은 얼굴이나 성격 등을 고려해서 짓는데 이 아이는 조금 특별했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이름을 지었어요. 3개월 정도 됐을 때인데, 제 이름과 아내 이름을 합쳐서 지었어요."


선생님은 아이에게 말했다. 태어나기 전부터 수어 이름을 가진 건 네가 처음일 거라고. 태어나기 전에 수어 이름을 갖게 된 첫 번째 아이라니, 이야기를 듣는데 아이를 향한 애틋함이 느껴졌다. 그게 참 멋지다는 거, 그들은 알고 있을까.


나는 수어를 배우며 농문화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접하게 된 영화가 '코다(CODA)'다. 영화를 보고 오랫동안 충격과 울림 속에 머물렀다. 농인 부모와 청인 자녀, 이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코다는 부모와 세상의 다리 역할을 하며 살아갔다. 병원, 시장, 이웃과의 갈등 해결까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이른 것을 떠안고 있었다. 세상의 소리를 대신 전하고, 세상의 반응을 대신 받아내는 아이. 아이는 부모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였기에, 자신이 없으면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 책임이라는 무게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연극 <나는 코다입니다> 주인공도 비슷한 삶을 살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아이들과 달리 부모와 수어로 소통했고, 부모가 농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받았다. 수어와 음성언어라는 두 세상 사이에서 나는 누구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그들은 수어의 세계에선 '청인', 음성언어의 세계에선 '농인의 자녀'로 낯설게 여겨졌다. 두 세계 사이에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지만 끝내 주인공은 자기만의 길을 찾아간다. 정체성의 혼란을 지나 스스로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멋있어 보였다.


오늘 만난 아이도 두 세계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까. 사실 코다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산다. 나 역시 성장 과정에서 사랑받지 못했다는 느낌으로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더 바란다. 이 아이는 그 긴 터널을 지나가더라도, ‘나는 사랑받는 존재야’라는 확신을 잃지 않기를, 부디 세상의 시선보다 부모의 손길과 사랑 속에서 자라난 자신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아이는 부모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까?

농인 부모가 세상 속에서 아이를 키워낸 건 기적처럼 느껴진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알려준 이들은, 실은 누구보다 강하고 따뜻한 부모다.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누군가의 프라이드란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길을 가든 네가 받은 사랑을 잊지 말고, 그 사랑으로 너답게, 너의 언어로, 너의 길을 걸어가렴.

세상이 뭐라 하든, 너는 이미 충분히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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